왜 오랜 기간 일을 하다가 언젠가부터 우울해지는가. 자신의 지능과 능력이 떨어지지도 않았음에도 어느 순간부터 모욕감이나 추락감에 빠져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런 일이 자신에게 생기는가.
그 이유는 일에서 자신의 뛰어남을 입증하는데 촛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자신의 능력을 얼마나 나타냈는지와 그로 인해 얼마나 인정받았으냐가 중요해진다. 이 기준에서는 동료와의 경쟁과 비교의식을 갖게된다. 설사 자신이 매우 잘하고 있더라도 타인의 능력이 입증되는 그 순간에 자신은 실패자가 되어버린다. 이것은 원인 불명의 자존감 추락 사건이다. 스스로 봐서 크게 잘못한게 없고 누가 어떤 잘못을 지적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자존감이 크게 추락하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며 원인을 찾다보면 평가의 불공정성이나 상사의 몰인정 및 한계적 상황에 집착하며 심적 고통을 거머쥐고 불행해 한다.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려 노력할 때는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한다. 타인에게 불필요하게 정보를 숨기거나, 타인의 업적을 무시하거나, 또는 은연 중 과시적 행동으로 타인의 건전한 업무 동기를 훼손할 때도 있다. 이 여건에서 개인의 자존감은 서열, 직급, 권한 등 타인보다 위에 있어야만 가치가 발생하는 수직적 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집단에서 최상위 소수만 성취하는 게임에 스스로 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이 indivisual contributer로써 원자화되고 업무관계가 수평화되는 시대의 코드에 원칙적으로 폐쇄적 관점을 갖게 된다. 자신의 훌륭함이 입증되지않는 시스템이란 분명히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라 믿는다. 이 게임에서는 실패한 적이 있는 자와 실패자를 구분할 수 없다. 모든 순간에 자신이 입증되느냐 이니냐가 성패를 가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능력 입증을 가로막는 사람을 적대시 한다.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다보면 한편 더 우울해진다. 연차와 직급이 높아질수록 타인보다 비교우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압도적으로 입증하기란 쉽지않다. 더 많이 노력할수록 더 많이 실망한다. 나아가 그것이 두려워 그냥 조용히 지내는 편이 아름답다고 여기며 건재한 가능성들을 알게 모르게 소멸시켜 나간다. 그러면서 점차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 자신이 실패자임을...
실패한 적이 있는 자와 실패자는 같지않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이의 본성은 넘어졌을 때 일어서려고 하는 것이다. 걸을 능력을 입증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자각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있지도 않다. 단지 더 걷고자 노력할 뿐이다. 그 발전을 부모가 지켜봤는지를 확인하고 흡족해한다. 자신이 전보다 더 잘했는지에 어린 뇌는 판단력을 가진다. 이것은 발전 욕구 및 그 충족에 관련이 있다.
능력을 확인하기위해 일 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된 접근이다.
무능이 노출될 위험에 도전하지 않게되고, 그런 지배력을 유지하고자 타인에게 억압적 태도를 보이게된다. 학생으로 치면 어제 잘풀어 칭찬받았던 그 문제만 또 풀려고 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들은 은연중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 왜 기회로 오지않는지 아쉬워한다. 어제 잘푼 그 시험지를 또 안줘서 자신이 좋은 성적을 유지할 수 없다는 믿음이다.
핵심은 성취 기준이 입증에 있느냐 발전에 있느냐다.
성공학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실패는 모멸적 결과가 아니라 더 큰 발전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다. 마침내 잘 걷게되는 아이는 몇 번을 넘어졌는지 세면서 불행을 측정하지않는다. 자신은 잘 걸을 능력이 있는데 왜 하필 땅이 이래서, 하필이면 지금 다른 보행자가 나타나서라며 외부 실패 요인을 편향적으로 크게 define하지도 않는다. 걸을 때 열리는 그 엄청난 시야에 빠질 뿐이다. 그게 애초에 다시 또 다시 일어서야하는 이유였다. 발전 과정을 지켜보며 박수쳐주는 부모를 보면 일어서서 더 오래 걷는 것이 바른 판단이었다는 확신에 찬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었고 그것으로 인정받았느냐가 아닌, 스스로 발전 조건의 최고점에 있는지에 촛점을 두는 자가 이 후 지속적 성취를 가진다.
몇 번을 일어서서 마침내 잘 걷게된 아이는 언젠가 비슷한 상황에 다시 직면한다. 자전거를 타면서 중심을 잃고 휘청이기를 반복한다. 엄청나게 잘 걸어서 성공적 삶의 기로에 있던 자신에게 왜 지금 불운의 자전거가 주어져서 실패자의 길로 가고 있는가라고 생각하지않는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안다. 또 다시 패달을 밟고 또 다시 패달을 밟으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조력자인 부모는 안다. 아이에게서 자전거를 치울게 아니라 넘어져서 피가 나면 그제서야 밴드를 붙여줘야 한다는 것을.
인생은 녹록치않다. 아이는 자라서 물로 간다. 직감한다. 이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고수준의 위험이 있다는 것을. 살다보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고민하지는 않는다. 다만 다른 아이들은 이미 수영을 잘 한다. 실패자가 안되도록 그냥 물가에 조용히 머물다 떠나려 한다면, 물 보다 자신의 엄청난 능력을 보여줄 걷기나 자전거 트랙에만 머물려 한다면 물은 평생동안 아이에게 생존의 방해물로 남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의 정체가 찾아온다. 생각한다. 왜 사람들은 나의 걷기 능력과 자전거 운전 능력을 이제 무시하는가. 사실 그 시기 대부분의 다른 아이들도 잘 걷고 한 손으로도 자전거를 탄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새로운 상황에서 더 발전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 선택한다. 사실은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이 번에도 성장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생에 최초로 물가에 서는 것을 위협적이거나 초라한 상황으로만 인지해서 환경을 원망하거나 극도의 거부감을 보이면 그 때부터 아이는 물 앞에서 자폐적이 될 수 밖에 없다. 반면 어떤 아이는 언젠가부터 산을 타고 또 어떤 아이는 암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많은 성공을 경험하고 또 많은 능력을 입증한 기성인들은 환경이 바뀌는 한 순간에 자존감을 박탈당한다. 성장하기를 스스로 중단했기 때문이다.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그 물 안에 몸을 담궈 지금 앞으로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 다만 두려움과 고통은 더 크다. 발로 물을 가르기를 반복하고 손을 번갈아 젓기를 반복하면서, 물을 먹어 기침하고, 코로 물이 들어가 이마 속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와도 언젠가부터 물에 잠시 떠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조금씩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성장하며 익힌 그 기억대로 될 것이다.
주저앉는 모습을 보였는가. 넘어져서 무릅이 까졌는가. 물을 먹고 숨 넘어갈 듯 맥을 못 췄는가. 그리고 모욕감에 빠져 자존감이 잿덩이가 되고 실패감에 각인당해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를 묻는가. 그것을 묻는 순간에 실패한 적이 있는 자에서 실패자가 되는 걸로 끝이 난다.
사실은 진작에 왜 잘 나갈 뿐 실패하지 않는지를 물어야 했다.
왜 자신을 능가할 대단한 도전자가 나타나지 않았는지,
왜 자신의 중년 시기에 인생과 일과 가정을 다시 정의할 그런 위기가 오지 않았는지,
왜 자신을 또 다시 낯선 어딘가로 끌고가서 위축되게 하는 사람이 없었는지.
어제 푼 시험지만 계속 다시 풀며 백점을 맞아 왔던 것이다.
자신이 날 수 있는 새였음을 깨달아야한다.
더 높이 날수록 떨어질 때의 충격과 고통이 큰 어느 임계점부터 날지않게 되었다.
실패하는 삶의 성장이 정체된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실패하지않는 삶이 잘못된 것이었다.
실패해야하고 또 떨어져야한다. 그래서 근력을 기르고 잘못된 것을 고치고 균형을 잡아나가야 한다.
자신의 시선을 저 푸른 창공에 두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