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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rdy Aug 16. 2021

윤석열의 비만과 잘못된 글쓰기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최근 경향신문에 실린 이 칼럼을 읽어보시라.


https://www.khan.co.kr/opinion/column/article/202108120300055


해당 칼럼이 굉장한 논란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윤석열의 쩍 벌어진 다리의 원인으로 복부 비만과 허벅지 안쪽 근육의 부재를 꼽았다. 운동을 하지 않은 윤석열의 몸을 유죄라고 칭하자 야권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여성 뿐 아니라 남성도 외모를 이유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번더 칼럼을 반추하면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갑자기 뜬금없이 윤석열 비만 얘기는 왜 나온 걸까. 이 글을 쓴 홍예은 씨는 아마도 몸을 비유로 들어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몸이 그저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계급과 계층 혹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고 있고, 차별받는 존재라도 몸은 소중하며 이들을 돌볼 준비가 되어있는 리더가 필요한데 윤석열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차기 대선 후보로서 부적합하다는 결론을 내기 위한 의도였다고 다분히 추측해본다.


홍혜은은 윤석열에게 돌봄 마인드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윤석열의 두 가지 발언 - 부정식품과 120시간 노동 - 을 예로 들었다.


먼저 부정식품 발언. 윤석열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먹으면 병에 걸려 죽는 식품이면 몰라도, 부정식품이라고 하면 없는 사람은 그 아래도 선택할 수 있게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발언해 공분을 샀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먹거리를 계층에 따라 구분한다는 비판이었다. 몸에 좋은 먹거리는 비싸다. 그만큼 돈이 들어가는 환경에서 자랐고, 인건비도 더 많이 필요하다. 부자들은 어릴때부터 이런 좋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병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식재료의 값을 일괄적으로 낮출수는 없더라도 인간의 본질적인 먹는 문제에 대해서 너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욕 먹어도 싸긴 하다.


120시간 노동 발언도 한심하다. 윤석열은 역시 언론 인터뷰에서 "일주일에 120시간 바짝 일하고 마음껏 쉬어라"고 언급했다. 그는 “스타트업 청년들을 만났더니 주 52시간 제도 시행에 예외조항을 둬서 근로자가 조건에 합의하거나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토로하더라”며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주 52시간제로 일자리가 생긴다고 주장했지만 실패했다면서 한 얘기다.



윤석열은 게임업계라는 특수한 분야의 상황을 한국 전체 노동상황에 빗대는 듯한 실언을 하면서 '재벌 중심의 사고를 가졌다'고 비판을 들었다. 내가 볼땐 친기업 마인드가 아니고, 아예 생각이 없는 소리였다. 그냥 청년들 만나니까 신나서 입을 턴 것 같다. 오랜 검사 생활이 오히려 독이 되는게 거침이 없고 당당하지만 엘리트로 살아온 그가 삼라만상을 다 알리가 없으니 좀 조심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는 것 같다.


아무튼, 홍혜은은 이런 윤석열의 상황인식을 비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윤석열은 몸이 주는 가치를 잘 모르고, 몸을 돌보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꾀했으나 잘 다가오지 않는다. 실패한 글이다. 한번 읽고 무슨 말을 하고싶은 건지 당췌 알수가 없다.


왜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홍혜은은 일단 몸과 돌봄의 개념을 독자에게 먼저 주지해야 했다. 소위 나 똑똑해요 하는 사람들이 글을 쓰며 하는 실수가 어려운 용어나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다. 돌봄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누군가를 돌보는 게 아니고 여성과 아동, 노인을 포함한 사각지대 인원이 필요로하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정책 용어다. 이런 배경 설명없이 뜬금없이 돌봄얘기를 하니 일반인은 돌봄이 도대체 뭔데? 하게 된다. 복지랑 비슷한 개념인가 보네, 하고 만다.


몸은 이 글 내내 중요한 메타포를 담당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다. 차라리 안전사고로 사망한 노동자의 마지막 식사가 컵라면이었다는 식의 가슴아픈 현실을 언급하며 몸의 중요성을 서두에 던졌다면 공감이 더 쉬웠을 것이다.  


그 중요한 서론에 굳이 왜 '여성들의 밥자리가 너무 평화로웠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의 식사자리보다 좋았다'는 내용을 넣었나. 굳이 페미니즘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고서도 나는 홍혜은이 겪었을 감정에 대해서 이해가 가고, 응원한다. 나는 아버지가 먼저 나서 설거지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그런 가정에서 자랐기에 홍혜은을 100% 공감할 수 없지만 내 경험으로 남을 재단할 수 없기에 열린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런걸 다 떠나서, 몸과 돌봄을 이야기하는데 굳이 이런 젠더적 이야기를 왜 삽입하는 것인가? 본인이 꼭 넣고 싶다고 해서 글 전체의 완결성을 해치는 에피소드를 배치하면 글이 중구난방을 피하기 어렵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돌봄 서비스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점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사례와 이야기가 차라리 필요했다.


그리고 이 글에는 근거가 부족하다. 윤석열의 말도 분명 훌륭한 비판거리지만 돌봄이라는 구체적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윤석열 캠프의 복지정책이나 돌봄플랜을 분석하고 다른 대선 후보와 비교하며 좀더 세부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주장을 폈어야 한다. 그런데도 홍혜은은 윤석열의 발언 2개를 가지고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무엇이 안중에도 없는지는 이미 자명하다'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물론 개인의 해석이나 유추는 자유겠다만 너무 빈약한 논리 구조 아닌가.


나는 문단별로 제대로 연결도 되지 않고, 글의 논리 구조를 해치는데도 굳이 쓸데없는 사례(여성들만의 식사자리)를 넣었으며, 글을 관통하는 주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약하고, 몸과 돌봄에 대해 제대로된 설명없이 써내려 간 글이 도대체 저명한 언론매체에 어떻게 실렸는지 너무 궁금하다. 홍혜은이 우리에게 던진 사유는 곱씹어 볼만하나 신문 지면의 한계를 고려하더라도 기본을 채우지 못한 칼럼이었다. 한 네티즌은 칼럼을 읽은 일부 사람들이 홍혜은을 향해 페미니트스냐, 친문이냐고 비판하는 것을 두고 수준이 떨어진다고 지적하던데 그 글의 수준이 형편없기 때문에 논쟁도 형편없는 것이다. 플랫폼의 제한성을 탓하기 전에 본인 글의 딜리버리 능력을 고민해야 한다. 그놈의 지적 우월주의가 낳은 불친절한 글을 보면 쌍욕부터 날리고 싶어진다. 좀더 편하게 쉽게 친절하게 쓰면 어디가 덧나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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