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한 2025년 기자의 세상보기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탔다. '잊지 못할 취재원', '취재과정의 에피소드', '언론에 보도되지 못한 뒷이야기' 또는 수필 등 기자로서 느끼고 경험했던 다양한 이야기를 보내면 된다고 하길래 문득 12년 전 취재가 생각났다. 공모작을 그대로 브런치에도 소개해 본다.
<어느 화가의 마지막 소원>
최근 누군가 페이스북 담벼락에 글을 남겼다. ‘기자님 안녕하세요! 서울의료원에서 만난 암 환자분 미술 전시회에서 뵌 적이 있는데요…’ 이름이 낯익었다. 순간 기억이 번쩍 났다. 정확히 12년 전 서울의료원 취재 당시 만난 간호사 분이었다.
당시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회부 경찰팀 막내 기자였다. 그때 회사에선 ‘웰다잉’ 시리즈를 연중 기획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한국이 저출산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시점에서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존엄하게 끝낼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자는 취지였다. 기존에 보도된 기사를 본 간호사 분이 회사로 제보를 했다. 의료원에 입원한 환자 한분이 그린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데, 취재를 와 달라는 요청이었다. 데스크로부터 지시를 받은 나는 곧장 택시를 타고 서울의료원으로 향했다.
기사의 주인공은 화가 한윤기 씨였다. 의료원 로비에 들어서자마자 환자복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쓴 그가 눈에 띄었다. 그는 전시장 입구쪽에 서서 방문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었다. 눈을 잘 뜨지 못했지만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였다. 폐암 말기의 고통 속에서도 한윤기씨는 품위를 잃지 않았다. 호스피스 병동의 동료 환자들은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작품들을 응시하며 제각기 엷은 미소를 띠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한윤기 씨는 40년 경력의 화가였다. 그는 원래 사진작가였다. 1970년부터 카메라를 한 대 사서 전국의 바다와 강, 산을 돌며 렌즈에 담았다. 사진에 미쳐 있던 어느 날 ‘자연을 직접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붓을 들었다고 한다. 한 점 한 점, 먹을 갈아 그려낸 300여점 작품에는 자연을 사랑하는 한씨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쉽게도 그는 주목받는 화가가 되진 못했다. 1988년 충남 예산 ‘윤봉길의사기념관’ 개관 때 작품을 전시하긴 했지만 정식 전시회는 열지 못했다. 2남 2녀 자녀의 생계를 책임지기에도 힘에 부쳤다고 한다. 그는 여기저기 이삿짐 날라주고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렸다. 낮엔 짐 나르고 밤엔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한번도 팔지 않았던 한씨는 가장이자 예술가로 평생을 지내왔다.
그랬던 한씨의 인생은 2004년 위기에 봉착했다. 명치 부분이 쓰려 찾아간 병원에서 그는 폐암 진단을 받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고통이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는 붓을 놓지 않았다. 투병중에도 10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때 그린 작품은 이전 그림보다 선이 더 굵었다. 한 작품에 산과 바다, 강과 하늘을 한꺼번에 그리기도 했다. 그는 당시 “아파서 병원에 있지만 나무, 꽃, 강을 그리면 내가 병동이 아니라 자연의 한복판에 누워있는 것 같다”고 했다.
9년 간 투병했던 한씨는 2013년 말 서울의료원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했다. 병원에 온지 불과 2주만에 거동이 어려운 상태가 됐다. 몸은 힘들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열리는 미술치료 시간은 그에게 활력을 줬다. 그의 놀라운 그림 솜씨를 알아본 병원 측은 한씨를 위해 병원 로비에서 전시회를 열기로 한 거다.
전시회를 위해 서울 등촌동 한씨 자택에 있던 그림 50점이 병원 로비로 옮겨졌다. 대부분 자연을 담은 작품들이었다. 줄지어 창공을 나는 갈매기떼와 짙은 안개 속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웅장한 산세, 첩첩산중에 홀로 남겨진 초가집의 연한 흔적 등이다. 휠체어를 미는 보호자와 링거를 꽂고 지나가던 환자, 피곤해 보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림을 감상했다. 역린처럼 번져가는 병과 싸우는 그들의 표정에 잠시나마 편안함이 깃드는 시간이었다. 6시간 동안 열린 전시회가 끝나자 그는 아들에게 “최고의 영광이었다. 여한이 없다”고 했다.
전시회 이틀 뒤 한씨는 그토록 사랑했던 자연을 떠나 영면했다. 그의 영정 옆에는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을 낚시꾼과 뱃사공이 바라보는 그림이 나란히 놓였다. 그가 전시회에서 뱃사공을 가리키며 “이게 나”라고 했던 바로 그 작품이었다.
입사 이후 13년 간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인생이 마음대로 잘 풀려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돈을 번 사람이 있지만, 사실 정반대의 경우가 더 많다. 다만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노력하는 사람은 쉽게 찾기 어려웠다. 나는 병상에 누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그림 얘기만 하면 또렷해졌던 한씨의 눈빛을 가끔 떠올린다. 그렇게 꿈을 놓지 않고 살다보니 결국 전시회라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됐다. 기자로서 그 여정을 취재할 수 있었던 것은 참 영광이다.
그동안 정치부와 사회부, 경제부와 산업부 등을 거치면서 숱한 권력자와 조우했다. 국회의원부터 장차관, 청와대 참모들, 잘나가는 대기업의 수뇌부를 취재하다보니 마치 그들이 아니라 내가 권력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던 때가 있었다. 취재원에게 내가 조언을 하고, 그런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는 오만하고 위험한 발상이었다.
만나야 할 사람은 많고 시간은 없으니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정보를 줄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만 골라 만나던 때가 있었다. 잠시 즐겁고 재미있었지만 곧 공허함이 몰려왔다. 권력이란 것은 마치 불나방 같아서 금세 피어났다가 사라졌다. 활짝 만개했다가 지는 그런 권력을 수없이 목도하며 허탈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부터가 스스로 취재원의 급을 나누니 쉽게 티가 났고, 당연히 취재원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똑같은 자리, 계속 사람만 바뀌면서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다 깨달음을 얻었다. 기자와 취재원은 불가근불가원 관계라지만, 그래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기사를 쓸 만한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도 진심을 기울이자. 기사만 쫓으면 기사는 달아나고, 사람을 쫓으면 기사는 따라온다. 어느 선배의 가르침대로 그렇게 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 한켠에 자리했던 공허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결국 기자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이고,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대중이 원하는 건 오히려 크고 거창한 뉴스나 기사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발생하는 생활 기사나 잔잔한 미담 기사에 대한 꾸준한 수요가 있는 걸 보면 권력 위주의 기사만이 주목받고, 좋은 기사로 평가됐던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언론 환경이 우리 앞에 놓여있을지도. 오히려 그렇게 감춰진 이를 발굴해서 대중에게 알리고, 살기 힘든 이 시대에 그런 이야기로 누군가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는 것도 좋은 기자의 덕목인 것 같다.
당시 한윤기씨의 전시를 기획했던 간호사 분은 12년 만의 페이스북 글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환자분이 신문에 전시회와 자신의 모습이 나와서 정말 기뻐하셨어요. 평생의 소원을 멋있게 이루시고 이틀 후에 돌아가셨어요. 기자님. 환자분과 가족분들께 굉장히 큰 선물과 의미를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마음 속에 뜨거운 것이 훅 하고 올라왔다. 나는 왜 기자를 선택했는가. 왜 나는 기자를 계속하고 있는가. 기자로서 나는 무엇을 이루고, 우리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싶은가. 언론 혐오의 시대, 기자를 계속할 수 있을지를 두고 고민하던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기자로서 10년넘게 일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에피소드가 남았지만 가장 생각나는 사람은 바로 한윤기 화백이었다. 누굴 만나든 감사하게, 진심을 다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삶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