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사람이 되어주려면
'듣기'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무너지는 것이 삶의 영역이라면 다시 일어서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잘난 사람은 잘난'척'하지 않는다지만 잘난'척'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볼품없는 나에게 관심을 가져줄까. 무관심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누군가의 관심. 관심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이를 들어 '관종'이라 칭하기도 하지만,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하는 상황은 대단히 불안하고 공포스럽다. 마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에 빠지게 하니까.
사람은 관심을 '반응'으로 확인하려 든다. 연사들에게 가장 괴로운 순간은 청중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하거나 아예 없을 때다. 선생님들이 수업의 흥미를 잃어버리는 순간 역시 학생들이 수업에 관심이 없을 때다. 연인들에게 권태기가 찾아오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만났을 때의 상대방의 반응을 보고 관계의 깊이를 판단한다. 왠지 미적지근해 보이는 태도. 대답은 줄어들고, 다른 곳을 쳐다보는 횟수가 늘어나고, '읽씹'의 횟수가 점차 늘어난다면 '이게 권태기인가?' 하는 상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관심의 정도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호작용이다.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들이 반복될 때 '관계'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연결점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런 상호작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다. 바로 '반응'에 대한 두려움이다. 상대가 내 말에, 내 행동에, 내 호의에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가 두려운 것이다. 그 두려움이 상대를 향한 발걸음을 고민스럽게 한다. '내가 한 발짝 다가갔을 때, 상대방이 주춤하고 뒤로 물러서면 어쩌지? 괜한 시도를 했다가 오히려 관계만 어색해지는 건 아닐까? 그냥 이대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거절당하는 느낌은 참 괴롭다. 말을 걸었을 때 상대방이 무시한다면, 상대를 불렀을 때 등을 돌려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다면, 도움을 청했을 때 단칼에 거절해버린다면 단순히 대화 시도가 어그러져서가 아니라, 적절한 도움을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 존재를 거부당한 것 같은 몸서리치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내가 거절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시도나 행위가 상대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지만, 그렇게 딱 떼어놓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죄와 사람은 분리해서 생각하라지만 정작 석방되어 사회로 나온 범죄자를 보았을 때 보통사람과 똑같이 대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행위 또한 자신의 일부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칼로 무 자르듯 싹둑하고 도려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 강한 척, 상처 받지 않은 척. 그까짓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 나는 상처 받지 않아. 난 강하니까. 어른이니까. 평소에는 그래도 된다. 작은 일에도 매번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신뢰를 얻어내기 힘드니. 하지만 마음 놓고 엉엉 울어도 될 작고 안전한 공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느라, 혹은 사회적 가면을 깨끗하게 유지하느라 내면의 소용돌이를 꾹꾹 눌러야만 했다면, 어딘가는 보따리를 풀어둘 곳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안전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바로 그런 공간을 손에 넣는 일이다.
상대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주려면, 함부로 비교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이 좋다. 상대에게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힘들어하는 상대방에게 '다들 그렇게 만났다가 헤어지고 살아. 너무 괴로워하지 마.'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고통은 점수로 매길 수 없다. 찢어지게 가슴이 아프면 10점이고 견딜만하면 5점일까? 힘든 것은 그저 힘든 것이고, 괴로운 것은 그저 괴로운 것이다. 3년 만나던 상대와 헤어지면 10점짜리 아픔이고 6개월 만나다 헤어지면 5점짜리 아픔일까? 세상 사람들에게 이별이 일상처럼 일어나기에 이별의 아픔에 고통스러운 나는 엄살을 피우거나 마음이 약한 것일까? 부정하면 할수록 더 아파지는 고통 탓에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고통은 자책의 덤탱이마저 씌운다. 그저 힘들어버리면 한순간 눈물 흘리고 지나갈 것을, 우물 한켠에 고아두고 썩히면 암덩어리처럼 불어나 마음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중요한 것은 내 기준, 혹은 세상의 기준에 빗대어 상대의 마음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다.
안전한 사람은 그들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그 넋두리를 그저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들어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쉬운 일을 해주는 사람이 어째서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는 것일까? 그 이유는 관계는 '상호작용'이라는 것에 있다. 나에게 안전한 사람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내가 주위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는 분명 안전한 사람이 한두 명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얼마나 소중히 대했는가? 그들을 그저 불평불만이나 넋두리의 대상으로 소모하지는 않았는가?
누군가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어주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에게는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본능'에 가까워서 일단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어라? 저게 맞는 말인가?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정말 그 정도로 힘든 일인가?' 하는 생각부터 든다. 일단 이 생각에 대한 답을 찾거나, 상대에게 표현하고 싶은 마음, 예를 들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이런 일도 겪어보았는걸?'과 같은 말들을 내뱉지 않도록 인내해야 한다. 이 단계를 넘어서고 나면, 상대의 입장이 되어서 공감을 위한 노력에 들어간다. 적절한 공감을 통해 정서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을 때 비로소 안전한 사람으로 여겨지고, 감춰두었던 보따리를 펼칠 수 있게 된다. 어렵고 복잡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도 될 것 같은 '무장해제'의 느낌이 드는 것이다.
단지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듣는데도 적절한 '반응'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말을 나름대로 정리해서 다시 언급해주는 것과 같다. 내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것과, 상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반응'으로 표현해 주는 것이다.
생각의 기준을 '나'로부터 '상대방'에게 옮겨가는 일은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모든 노력에는 에너지가 소모된다. 즉 내게 '안전한 사람'이라고 느껴졌던 상대방들은, 이런 의식적인 노력과 공감, 적절한 반응 등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그들의 노력에 내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면 관계의 상호작용에서 벗어난 것이며,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느낌을 주는 이 관계에 곧 지쳐서, 지금의 관계를 지속할 동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호의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은 얻고 싶어 한다. 안전한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그들의 노력을 귀중한 것으로 인식하고 알아차려주는 것이다. 작은 감사의 표현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윤활유의 역할을 한다.
내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쉬운 것만 고집해서는 관계는 깊어지기 어렵고, 대화는 말보다 경청이 우선이다. 입은 하나인데 귀는 두 개인 것에는 말보다 듣는 것에 더 집중하라는 창조주의 섭리가 담겨 있다. 말하는 것은 나를 표현하는 것이지만 듣는 것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듣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잘 듣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안전한 사람'이 되어줄 수 있고, 그런 사람 주변에는 안전한 사람 또한 나타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