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어떤 집단 무의식이 작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집단최면에 걸린 채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문화' 또는 '조직문화'라 칭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는 맥락 중심의 문화로 '나'와 '우리'의 구분이 모호하다. '우리'나라, '우리'집, '우리'회사, '우리'와이프라고 자연스럽게 칭하지만 왠지 '내'나라, '내'집, '내'회사, '내'와이프라고 하면 어딘지 모르게 버릇없어 보이고 거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처럼 여겨진다. 말하지 않아도 눈치껏 다른 사람이 에둘러 표현하는 것도 잘 캐치해서 이행하는 센스가 중요시된다. 즉,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기 어려운 문화, 관심의 많은 포션을 타인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소모해야 하는 문화를 갖고 있다. 조화와 단합을 중요시하고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 튀는 것보다 타인과 무던하게 섞여 지낼 수 있는 겸손과 양보가 '미덕'이다. 하지만 문화는 나라마다 다르다. 즉, 한국의 문화는 한국인들에게는 당연할 정도로 굳어진 관습이지만, 타국민들에게는 정답이 아니거나 이상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집단이 가진 고유한 문화에 오랜 시간 노출되다 보면 그 문화가 가진 특성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게 된다. 가랑비에 옷 젖듯, 직사광선에 노출된 책이 점차 노랗게 변색되어가듯 이러한 받아들임은 너무나 은밀하고 자연스러워서 자신의 사고방식이나 태도 같은 것들이 집단의 그것을 은연중에 닮아간다는 것을 인지하기 어렵다. 그렇게 인간은 집단의 일부로 살아가게 된다. 마치 그것이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가 된 것처럼, 집단 무의식은 나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는다.
만약 병에 걸린 사람이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매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병자가 충분히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에 있었음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그가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했다면, 그것의 목적이 아무리 숭고하거나 대의를 위한 것이었다고 해도, 그런 행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나 문제의식이 제기되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실험이 집단으로 자행되었다면, 분명 그 사회가 정의롭다고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집단 무의식'에는 이런 비윤리적인 행위들조차 '정당화'시킬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사회 저변에 흐르는 집단 무의식의 존재는 집단의 구성원 모두에게 풀리지 않는 최면을 거는 것으로 보인다. 오랜 시간, 서로가 서로에게 집단 무의식을 가르치는 사제관계가 되고, 각자의 행동이 상대방이 가진 집단 무의식에 대한 현실적 근거로 작용해 어떤 생각이나 사고방식, 태도와 같은 것들을 매우 정당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여기도록 한다. 아래 소개할 '터스키기 매독 인체실험'은 그런 집단 무의식의 위험성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터스키기 매독 인체 실험(출처 : 상담학 사전)
터스키기 인체 실험은 1932년부터 1972년까지 진행된 비윤리적인 실험으로 당시 미 공중보건국은 매독 치료를 하지 않은 자연 상태가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하기 위해서 앨라배마 터스키기 연구소와 함께 흑인 600명을 대상으로 비밀 인체 실험을 진행했다. 매독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기 위한 것으로, 흑인 매독 환자들에게 '나쁜 피(bad blood)'라는 병을 치료해 주겠다고 속여 동의서를 받아낸 뒤 고의적으로 치료를 하지 않았다. 실험이 진행되는 동안 이 사실을 흑인들에게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1943년 매독 치료에 효과적인 페니실린이 개발됐으나 이 역시 사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실험에 참여한 7명이 매독으로 사망하고 154명이 합병증으로 숨졌다.
비윤리적인 매독 실험의 과정과 결과는 1936년부터 1973년까지 정기적으로 의학저널에 보고되었지만 아무도 그 윤리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이후 공중보건국에 근무하던 피터 벅스턴이 1972년 신문에 사실을 알리면서 사회적 이슈가 되었으며, 1973년에 실험이 중단되고 청문회까지 열렸지만 관련 의사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였다. 1997년에 이르러서야 클린턴 대통령이 몇몇의 생존자와 다수의 사망자에게 애도를 표하며 사과했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은 소수자인 흑인에 대한 백인들의 인종차별적 집단 무의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비윤리적 생체실험이다. 이 실험을 주도한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실험 데이터의 하나로 여겼고, 피험자들을 속여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도록 의도적으로 방치했다. 그들의 이런 무의식은 매독에 걸린 흑인들을 치료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데이터를 훼손시키려 하지 마라'라고 답변한 것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데, 실제로 그들은 1943년 페니실린이라는 매독에 효과적인 치료제가 등장했음에도 실험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에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의 말마따나 '실험 데이터를 훼손'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그들이 다른 동네의원이나 의료기관으로부터 페니실린이 포함된 치료약을 처방받을까 우려해 타 의료기관에 그들의 명단을 제공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들이 페니실린을 처방받아 매독 증상이 완화되거나 치료되면 정확한 데이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40년간 이어진 매독 실험에서 600명의 흑인 참가자 중 26.8%에 해당하는 161명이 매독에 의해, 또는 그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실험을 주도했던 자들은 그저 '어디 사는 아무개, 00년 0월 0일 어떤 질병으로 사망'이라고 기계적으로 그들의 사망을 기록했을 것이다. 그 데이터를 얻는 과정에서 한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어쩌면 결과를 기록하는 표에 이름조차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600번까지 매겨둔 번호만 기록하고 말았는지도. 이처럼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 집단 무의식이 가진 가장 위험한 일면일지도 모른다.
매독(Syphilis) * 출처 : 질병 백과
성 접촉에 의해 전파되는 감염성 질환으로, 매독에 감염되었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몸속의 매독균이 모두 없어질 수 있다. 치료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으면 잠복 매독으로 남아있을 수 있다. 성기 주위에 통증이 없는 궤양이 생기는 것이 1차 매독이며, 이것은 치료하지 않아도 호전될 수 있다. 하지만 매독의 원인균인 트레포네마 팔리듐균이 혈액을 타고 전신으로 퍼지면 발진 등의 2차 매독이 발생한다. 2차 매독 역시 치료하지 않아도 호전될 수 있다. 하지만 2차 매독은 3차 매독으로 진행하거나, 잠복 매독 상태에서 수년, 수십 년 간 증상이 없다가 3차 매독의 형태인 동맥염, 뇌신경 매독으로 발현될 수 있다. 1기, 2기, 초기 잠복은 페니실린 근육주사를 한 번 맞는 것만으로 치료할 수 있다.
아마도 40년간의 긴 추적 실험을 통해, 매독이 치료되지 못한 채 몸에 남아 있으면, 1기, 2기, 잠복기, 3기를 거치며 어떤 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지 위의 백과사전에 기술된 것처럼 유용한 데이터들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면 '1기, 2기는 치료하지 않아도 호전된다'와 같은 내용들이다. 이런 내용들은 치료하지 않은 채 매독에 감염된 사람들을 꾸준히 지켜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내용들이다. 더불어 매독이라는 질병을 적절히 진단하고 치료해내기 위한 데이터들을 취합해 다른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데 활용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독은 그저 페니실린 근육 주사 한 번이면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이었다. 이 실험이 가장 비윤리적이고 인간에게 위험한 이유는 그들이 치료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환자들에게 적용하지 않았고, 그런 행동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들이 흑인들을 대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이처럼 비윤리적 생체실험을 실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편견이 깔려있었다. 그들에게 형성된 집단 무의식은 이처럼 말한다. "매독은 흑인들처럼 도덕적 관념이 부족하고 분별없이 성관계를 갖는 저급한 인종들에게만 생기는 병이야. 그러니까 '당연히' 매독에 대한 실험은 흑인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어야 해"
또한, 당시 실험에 '나쁜 피'를 치료한다고만 듣고 기만적 치료에 숨져갔던 흑인들은 앨라배마 주 메이컨 군에 거주하던 빈곤한 소작농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실험에 참여하는 대가로 무료로 의료, 식사가 제공되었고 사망할 경우 상조비용도 제공되었다. 여기서 또 다른 그들의 집단 무의식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차피 저 흑인들은 가난해서 치료받을 돈도 없는 사람들이야. 어쩌면 돈이 없어 굶어 죽게 될지도 모르지. 매독이 그렇게 괴롭거나 당장 죽는 병도 아니잖아? 우리는 그들이 위대한 실험에 참여할 기회를 제공할 뿐 아니라 기초적인 생활이 가능하도록 보상도 제공해주는 거야. 오히려 1석 2 조지. 그들에게도 실험에 참여하는 것이 참여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을걸?"
집단 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공감능력 상실을 초래한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들의 생명도 자신들의 생명과 같은 소중하고 하나뿐인 것'이라는 '인식'조차 사라진다. 그들의 죽음은 자신들의 죽음과는 다른 별 볼 일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낸 최면의 위험성은 끊임없이 '비교'를 통해 자신을 정오를 판단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으로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거나 바로잡기 어렵다는 데 있다. 주위 사람이 나와 유사한 사고방식과 태도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합리적인 문제의식을 느낄 기회가 줄어들거나 거의 없어진다. '저 사람도 나랑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네? 내 생각은 역시 틀리지 않았어. 지금 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거야.' 이런 식으로 집단 내에서의 비교는 오히려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다.
집단에 속한 대부분의 구성원이 유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그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최초에는 호기심이나 의문, 문제의식 같은 것이 일어나더라도, 시간이 흐를수록 또는 그 집단 내에서 자신의 위치가 공고해질수록 그것을 함부로 표현하기 어렵다. 이미 그것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거나 위화감을 줄 위험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터스키기 매독 실험에 대해 최초로 문제제기를 했던 '피터 벅스턴'은 분명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고 왕따를 당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문제제기와 결단은 상식적이었지만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저 집단 무의식을 자신에게 맞게 해석해 적정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기 쉽다.
집단 무의식은, 그들에게는 당연하지만 해당 집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보기엔 이상하거나 특수한 것이다. 그리고 집단 무의식이 극단으로 치우치면 '집단이기주의'로 발전한다. 집단이기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틀린 것으로 간주하고 배척할 뿐 아니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똘똘 뭉쳐 비틀어진 대적관을 확립해간다. 집단 이기주의가 그저 자신들 사이의 유대감을 공고히 하는데만 사용되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인 행태들을 보면, 일부 집단이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하기 위해 집단이기주의를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악착같이 모아 온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마지막 발악과도 같다.
누가 봐도 이상하고 이해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고, 때로는 더없이 정당하고 순수한 정의를 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집단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할 정도로 그들이 이미 자신이 속한 집단에 완전히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인원수가 적고 끈끈한 조직문화를 강조하는 집단일수록 그 집단이 가진 집단 무의식을 거역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곧 해당 집단으로부터 배제되어도 상관없다는 의사표시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때로 어떤 집단이나 직업은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에, 그곳에 들어가고 나서야 깨달은 집단의 추악한 무의식이나 관행, 관습과 같은 것들을 도저히 거부하지 못한다. 그렇게 그 안에서의 시간을 쌓아 가다 보면 누구나 같은 무의식에 빠져들고 만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성찰은 타인이 대신해주기 어렵다. 설사 집단의 경계 밖에 서있는 사람이 합리적이고 정확한 평가를 내려준다고 해도, 집단의 구성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내부 사정이나 현실적인 문제, 혹은 전문지식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외부에서 마음대로 지껄이는 소리'로 치부해버리기 너무 쉽다.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집단 무의식은 강력한 '최면'과 같다. 만약 우리가 집단최면에 걸린 채 무비판적으로 살아간다면, 우리의 처지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이용당해야만 했던 '터스키기 매독 실험'의 흑인 희생자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려운 일이 될 수 있지만, 자신이 어떤 집단 무의식에 물들어 있는지 스스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