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에 간판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리며 핸들을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려왔다. 우측 방향지시등을 넣고 왼쪽 차선으로 넘어가면서도 뒤에서 왜 시끄럽게 경적을 울려대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조급함과 적대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뒤차의 거친 움직임은 오히려 약간의 분노를 일으켰고, 그 분노의 여파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정지선에 멈춰 서고 나자 거칠게 뛰던 심장이 조금 진정을 되찾는 것 같았다. 미친 듯이 춤추는 신호등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끼익'거리는 소리가 이제는 한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까부터 자꾸 짜증이 치솟았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간판이 내 차 위로 떨어지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어. 그랬으면 진짜...' 자동차가 파손되거나 내가 다칠 것 따위가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들러야 할 곳도 많았고 체크해야 할 것은 더욱 많았다. 하지만 시간은 늘 턱밑까지 쫓아왔다.
극심한 갈증이 치밀어올랐다. 마실 것을 찾아보려는데 다시 녹색신호가 켜졌다. 필요할 때면 신호는 늘 짧았다. 수많은 자동차들이 일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으며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려 하는데 눈부심이 짜증을 더했다.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내가 가는 방향은 동쪽이었다. '지금이 눈부실 시간이 아닌데?' 눈부심의 근원에는 삐걱거리는 도로명 표지판이 있었다. [현로서 8길] 아직 20분은 더 가야 했다. '오늘 무슨 날인가! 하루 종일 살얼음판이네." 투덜거리는 귓가로 고된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대화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모든 걸 쏟아붓자던 두 사람은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우고 있었다. 애꿎은 스마트폰이 날아다녔고 자개 문양이 새겨진 고급스러운 명패는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자며 사장이 선물해준 명패였다. "내가 진짜 사장이냐? 네가 날 사장 취급 해준 적 있어? 제발 귀 좀 파고 말을 하면 좀 들어. 아니면 네가 알아서 다 하든가!" 딕션은 명확했지만 명백한 소음일 뿐이었다. 귓바퀴를 두드리던 외계어는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졌고 나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다른 관심거리가 필요했다.
인생의 앞날을 전혀 가늠할 수 없던 그 순간에도, 이마의 가려움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히터 바람에 흩날리던 머리카락 몇 가닥이 모든 감각을 그쪽으로 집중시켜주었다. 아랫입술을 길게 내밀어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짜증 나게 하는 머리칼을 넘겨보려는 '순수한' 시도였지만 그 모습이 그의 눈에는 거슬렸던 것 같다. "야! 너 내 말 듣고 있긴 한 거야? 너 정말 안 되겠구나?! 너 나가! 너 나가아~!" 하지만 말대답은 운명이었을까. 바른말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오고 말았다. "여기 제 방인데요." 책상 위에 마지막으로 남은 모나리자마저 집어던질 태세를 취하고 있던 그는 한동안 붉게 상기된 얼굴로 나를 노려보다가 말없이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공손한 자세로 조용히 문을 닫은 나는 생각했다. '왜 지가 실수해놓고 나한테 지랄이야.' 차단된 공간의 안쪽에는 여전히 날아다녀서는 안 될 물건들이 중력에 저항한 흔적들이 즐비했다. 환기가 필요했다. 사무실 공기도. 그리고 내 마음도.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창문을 열고 바깥공기를 한껏 흡입했다. 미세먼지가 '나쁨' 단계였지만 사무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무거운 공기보다는 훨씬 더 몸에 이로울 것 같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액정이 나간 그의 스마트폰이 보였다. '밟아버릴까?'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정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지금 찾아가는 것은 꼴등 전략 같았고, 핸드폰을 찾는답시고 그가 내 방을 다시 찾아오는 것은 더욱 싫었다. 방역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마음으로 엄지와 검지 끝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바깥의 회의 테이블 끝에 그것을 살짝 걸쳐두었다. 다시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광기의 흔적을 덮어버리기 위해 사무실 곳곳에 페브리즈를 광적으로 뿌리고 다녔고, 머리 위에도 잔뜩 뿌렸다. 그렇게 사무실 곳곳을 휘젓고 다니자 알래스카의 시원한 향인지 모를 것들이 콧구멍을 타고 들어왔다. '이제 좀 나아졌군.' 다리를 꼬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나는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문제는 디테일이야. 니 계획엔 디테일이 없어. 자. 잘 들어봐..." 일장연설이 시작되었다. 그래 그 빌어먹을 디테일이 문제였다.
빨간 점퍼를 입은 할머니가 보라색 코르덴바지를 입고 녹슨 자전거를 낑낑거리며 횡단보도와는 거리가 먼 노상을 무단 횡단한다. 프라임 블랙 색상의 그랜저 XG를 탄 점잖게 차려입은 여성운전자가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으며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고 있다. 그 소리에 놀란 할머니가 자전거를 놓치고, 넘어진 자전거를 힘겹게 일으켜 세우느라 시간은 더욱 지체된다. 마뜩잖은 얼굴로 할머니를 노려보던 여성운전자가 핸들을 과격하게 돌리고, 오른쪽 차선으로 거칠게 빠져나가려다 찰나, 달려드는 시내버스와 부딪혀 할머니와 자전거를 그대로 덮쳐버리고 만다.
[그랜저 한대가 할머니를 덮쳐 사망에 이르렀다.]'는 한 문장을 한 단락으로 길게 늘어트리는 그런 디테일. 문제는 그런 디테일 따위 지금의 일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나도 그런 디테일 가래떡 뽑아내듯 줄줄 뽑아내고 싶지. 그런데 그게 쉽냐는 말이야. 쌀을 부어줘야 가래떡이 나오든 말든 할 거 아냐!" 입에서 계속 쉰소리가 툭툭 튀어나왔다. 한숨과 함께 기지개를 켜며 몸이 뒤로 젖혀졌다. 의자가 몸을 받쳐주는 느낌이 좋았다. 문득 [힘내 보다 '사랑해'라고 할게요]라고 쓰인 팽수 스티커가 눈에 들어왔다. 며칠 전 사장이 문구가 좋다며 붙여주고 간 스티커였다. 갑자기 짜증과 함께 냉소가 지어졌다. "'사랑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거칠게 몸을 일으키며 수첩과 핸드폰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이제 그 빌어먹을 디테일을 확인하러 나갈 시간이었다.
차에서 내려 거리를 걸었다. 바람은 여전히 강했고 하늘은 세차 안 된 유리창처럼 뿌옇기만 했다. 후드는 계속해서 바람에 넘어갔고 결국 나는 다시 쓰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자조 섞인 읊조림 속에 걸음을 옮기는데 얼굴을 덮치는 바람 때문에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려웠다. 쏟아지는 모래먼지에 입술이 바싹 말라왔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한 번 핥고는 즉시 후회했다. 입속까지 텁텁해지고 모래 씹는 느낌이 났다. '날씨까지 왜 이런 거야 오늘은.' 괜히 더 서러워졌다. 눈물이 흐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었다. 오늘 하루는 충분히 욕할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