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답은 들은걸로 할께, 부끄럼쟁이

단편의 단편소설

by 작가 전우형

여기 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눈물의 단어를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마는, 하잘 것 없는 사연이라도 대보려는 이유는, 빈 껍데기같은 연습장이라도 없으면 눈물을 써 넣을 곳이 없어서다. 하지만 이유를 찾아보려 할수록 물 속에서 눈을 뜬 것처럼 눈앞이 흐릿해졌다. 거울에 비친 한 남자가 눈가를 쓰윽 문지르며 말을 걸어온다.

"한심한 놈. 지금 눈물이나 질질 짜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나는 대답한다.


무거운 슬픔과 죄책이 이성을 짓눌렀을 때, 미뤄둔 치부를 스스로 인정하고 마는 것 같아서 그동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넋두리같은 이야기가 의식의 사슬로부터 풀려났다.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어서 모른척했던 진짜 나의 모습. 지우고 싶었던 목소리. 간헐적으로 나를 지배하던 그 목소리는 결국 내게 남아있던 한 줌의 온기마저 잔인하게 벗겨냈다. 속살이 그대로 드러나는 고통이 이별의 무게를 고스란히 알려주었지만 슬픔에 젖을 자격조차 없는 현실이 벗어날 수 없는 미로처럼 호흡을 죄어온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한 쌍의 눈동자. 그 미묘한 깜빡임. 말아쥔 손가락 사이로 연기처럼 빠져나오는 그 날의 기억.


사랑의 다른 이름은 이별이다. 이별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사람도 사랑에 빠지고 나면 이별의 두려움에 밤잠을 설친다. 사랑의 시작은 곧 이별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므로. 걸어간 시간만큼이나 이별은 버겁다.


나에게는 비밀이 있다. 거추장스러움 이상으로 처절하게 감추어야만 할 비밀. 그런 내게 사랑이 나타났다. 사랑은 비밀은 공유하는 사이다. 성실한 사랑을 위해 그녀에게만큼은 모든 것을 털어놓고 싶었다. 미안함이 두려움을 앞섰다. 마음이 복잡했다. 속이는 건 그녀의 진심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나도 성실하고 진실된 사랑을 하고 싶었고, 또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적어도 그녀에게만큼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두렵다. 너무나 두렵다. 비밀을 털어놓으면 그녀가 나를 떠나버릴 것이 두렵다. 그녀와 아무것도 아닌 관계로 돌아가게 될까 봐 두렵다. 무심히 아침거리를 걷게 될 것이 두렵다. 그녀의 벨소리가 더 이상 울리지 않을까 봐 두렵다.


그녀는 내 삶으로 들어와 곳곳에 존재하던 틈을 채워주었다. 시린 구석을 매만져주면서 겨울의 혹독함을 견딜 온기를 선물해 주었다. 내 삶의 대기는 그녀의 숨소리로 가득 찼고, 그녀의 목소리는 산소가 되었다. 그녀와의 이별은 산소통이 고장 난 다이버의 운명처럼 나를 질식사시킬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이고 또 망설이게 된다. 비밀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던 결정을 처절하게 후회할 것만 같다. 오지 않은 미래가 확정된 현실처럼 무겁다. 더 이상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될 것 같고 나도 용서할 수 없게 될 것 같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났다.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죄책감도 깊어져 갔다.




그녀가 나에게 청혼을 했다. 남자가 청혼해야 한다는 구시대적 발상 같은 것에 늘 발끈해왔던 그녀는 미적거리는 나를 대신해 먼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숨겨왔던 비밀에 대한 미안함이 먼저 떠올랐다. 더 이상은 숨길 수 없었다. 그동안 목젖 아래 머물며 튀어나오지 못했던 응어리진 말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녀의 눈동자를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이제 불이 켜지고, 극장을 나가야 한다.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다.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처음으로 뒤돌아보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까지의 1m 남짓한 거리가 영원처럼 느껴졌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잊어버려야만 했다. 미친 듯이 달렸다. 나에게서 도망치고 싶어서 달렸다. 내가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발밑의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슬프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그냥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갑자기 그녀가 미웠다. 그래서 사랑 따위 시작하지 않으려 했는데. 어차피 진짜 나를 이해해줄 사람 따위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비가 내렸다. 나는 울지 않았다. 비가 대신 눈물을 흘려주었다. 나는 결코 울지 않을 것이다. 울면 지는 거야. 울면 포기하는 거야. 그런데도 조금씩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너무나 다른 온도가 느껴졌다. 그 미약한 온기가 잊어버리려 했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비는 차가웠다. 너무나 차가웠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내가 미웠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와 헤어졌다는 절망과 함께 나와 얽히고설킨 이별의 굴레가 나를 더 꽉 움켜쥐는 것 같아 숨이 막혔다. 터져 나오던 울음도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내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 비밀이 나의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나의 전부를 대신해버리곤 했다. 그런 폭력에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나도 내가 부끄러웠다. 자신이 없었다.




고장 난 테이프처럼 같은 장면만 반복된다. 그날의 장면이 영사기처럼 마음의 벽을 비춘다. 선명하다. 너무 선명해서 그녀의 눈빛과 표정 하나하나가 지워지지 않는다. 일그러진 얼굴로 말을 내뱉던 혓바닥이 떠오른다. 미칠 것 같은 후회가 고개를 든다. 왜 그랬을까? 그냥 내가 먼저 연락을 끊을걸. 다른 여자가 생겼다 말하고 뺨이나 맞을걸. 아무 말 없이 도망쳐버릴걸. 왜 그랬을까?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림자 같은 비밀을 질질 끈 채로는 그녀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녀가 진짜 내 모습을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약간의 희망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쩌면, 그녀라면 나를 이해해줄지도 몰라. 이런 나라도 받아줄지도 몰라.' 하지만 다 끝났다. 이제 모두 끝나버렸다.


울리지 않는 스마트폰을 본다. 매일 수십 번도 더 울리던 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세상이 정지해버린 느낌이다. 지갑 속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해맑게 웃고 있다. 그녀의 웃음에는 그늘이 없었다. 24시간 그늘져있던 나와는 달리 그녀의 얼굴은 늘 밝았다. 그래서 그녀가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 내게 없었던 솔직함을 발산하는 그녀가 좋았다.


이제 나를 향해 웃던 그녀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와 같은 이름과 모습을 가진 사람은 있으되 나와 사랑을 나누던 그녀는 없다. 그녀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건 현재가 팍팍하기 때문이라고 했지. 정말 그런 것 같다. 거울을 본다. 한 남자를 본다. 눈두덩이가 퀭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그 남자도 음울한 눈길로 나를 본다. 넌 대체 누구니? 왜 거기 있니?


엄마는 그만하라고 한다. 와서 밥이나 먹으라고 한다. 연락할 사람이었으면 벌써 했다고. 나는 그녀를 탓하지 않는다. 이런 나를 탓할 뿐. 다른 여자라고 해서 이런 나를 받아줄 수 있을까? 확신도, 용기도 없다. 아니, 있던 용기도 사라진 느낌이다.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의 음성이 귓전에 맴돈다. 질긴 미련이 남아 머리가 어지럽다. 전화기를 꺼버렸다. 더 이상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다. 기다리고 싶지 않고 신경 쓰고 싶지 않다. 밖에서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택배기사가 왔나. 그런데 엄마가 빨리 와보라며 나를 부른다.




"전화기가 꺼져있네?"

"어차피 전화 올 사람도 없으니까.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나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우리 이제 끝난 거 아니었어?"

"그냥,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했어."

"그래서 정리는 잘 끝났어?"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

"응. 그런데..."

컥. 갑자기 별이 보였다. 잠시 숨을 고르던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내 명치를 후려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대답은 지가 안 해놓고 나한테 성질이네. 죽을라고. 콱!" 그녀가 짐짓 무섭게 주먹을 한 번 더 치켜들며 말했다.

나는 일순간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대답?"

"너! 내가 그날 결혼하자는 말에 대답 안 했잖아. 무슨 지 과거사만 잔뜩 이야기하고 사라져 놓고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그랬던가? 그래. 내가 분명 결혼하자는 말에 답을 하지는 않았지. 하지만...


잠깐의 공백.


"그래서, 여전히 선택권은 나한테 있다는 거야? 내가 결혼하자고 하면 너 진짜 할 거야?"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장난으로 결혼하자고 말 꺼낸 줄 알았어? 현재 스코어에서 날 깐 건 너라고, 이 등신아! 빨리 대답해. 할 거야 말 거야?! 오늘도 대답 안 하면 나 그냥 갈 거고 우린 오늘로 끝이야!" 그녀는 과장된 몸짓으로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일순간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매만졌다. "얼굴이 많이 상했네. 눈물 좀 흘린 얼굴인데?"

부끄러워진 나는 고개를 돌리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다른 손까지 내밀어 내 얼굴을 잡더니 입을 맞췄다. 잠시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이 살짝 맞닿은 채로 소곤거렸다. "바보. 여자가 이 정도 들이댔으면 너도 좀 이끌어봐."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고 키스했다. 그녀는 놀란 듯 잠시 움찔거렸지만 그대로 몸을 내맡겼다. 바람이 불었다. 익숙한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가 귓가에 입김을 불며 속삭였다. "대답은 들은 걸로 할게. 부끄럼쟁이. 넌 늘 그렇게 중요한 말을 할 때면 머뭇거렸지. 그래도 난 네가 좋아. 나 같은 단호박은 아니라서."


나는 그저 그런 그녀를 더욱 꼬옥 끌어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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