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이 울리고 구급차에서 사람들이 내린다. 뒤집힌 창문 안쪽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보인다. 그녀는 안전벨트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가까이 다가간 소방대원이 손을 내젓자 문을 제거할 공구를 챙겨온 다른 대원이 접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를 흥건히 적신 기름 위로 스파크가 튀고 삽시간에 차량 전체로 불이 옮겨 붙었다. 당황한 구급대원이 황급히 소화기를 들고 달려가지만, 고막이 터질듯한 폭발음과 함께 뒤로 쓰러지고 만다.
거센 폭발의 여파로 문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정신을 차린 소방대원이 그녀를 가까스로 끄집어내지만 이미 온몸에는 불이 붙은 뒤였다. 비명을 지르며 구르는 목소리 뒤로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이제 막 도착한 소방차에서 소화수가 뿌려지고 화마가 주춤해진 사이 다른 소방대원들이 쓰러진 두 사람을 끌고 나온다. 매캐한 유황가스와 고무 타는 냄새가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사거리에서 구급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황급히 빠져나온다. 복잡한 아파트 단지 내 사거리 한복판에서 벌어진 차량 전소 사고로 인해 구급대원 1명이 전신 2도 화상의 중상을 입었고, 운전자는 불을 뒤집어쓴 탓에 의식조차 없었다.
응급실을 지키던 나는 너무 피곤해서 눈이 감길 지경이었다. 교대시간은 아직 멀었는데 정신은 몽롱하기만 했다. '잠을 제대로 자본 게 언제일까?' 그때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또 시작이군' 아무래도 오늘 근무도 무사히 넘기긴 힘들 것 같다. 힘들어도 지금 몰아서 당직을 서야 했다. 며칠 뒤의 결혼식을 위해 1주일 휴가를 내둔 상태였다. 일정을 맞추기 빠듯했지만 오늘이 결혼 전 마지막 당직이었다. 기지개를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사고는 많았고 다친 사람은 더 많았다. 인근에 제대로 된 응급실을 갖춘 병원은 이 곳뿐이었다.
가벼운 환자였으면 하는 바람은 산산조각 났다. 대충 봐도 자신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병원 전체에 콜이 걸렸고 대기 중이던 전문의들이 내려왔지만 그들 모두 잠시 말을 잃었다. 실려온 환자는 사람이 아니라 반송장에 가까웠다. 진피가 완전히 녹아내린 것도 모자라 지방과 근육 사이로 뼈까지 드러나 있었다. 이 정도면 흔히 보기 힘든 4도 화상이었고, 화상부위가 방대해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환자를 후송해온 구급대원의 설명이 잠시 안드로메다로 갔던 정신을 현실로 불러들였다.
"요 앞 학현 사거리에서 차량 전복사고가 있었나 봅니다. 이분은 차량 운전자이신 것 같은데요. 보시다시피 폭발과 화재로 인한 전신화상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이 정도면 차라리 즉사가 더 나았을 텐데.' 눈꺼풀이 녹아 붙은 탓에 눈을 뜨지도 못했고 미약한 가슴의 움직임과 곳곳의 경련만이 아직 숨이 붙어있음을 알려주었다. 가슴이 미약하게 남은 멍울의 흔적만이 이전에 환자가 여성이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단서였다. "신분증 같은 건 없었나요?" "차량 손상이 심해서 찾지 못했습니다. 환자가 너무 위급하기도 했고요. 아마 현장검식이 진행될 테니 거기서 뭔가 나오길 기다려봐야 할 것 같네요." 짤막한 말을 남기고 구급대원들은 자리를 떠났다.
결국 사고 환자는 얼마 버티지 못한 채 사망했다. 함께 후송된 구급대원은 화상으로 고통이 심각한 중에도 비교적 명료하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차량이 전복되어 있어서 문이 열리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문을 뜯어내기 위한 공구를 챙기러 간 사이에 저는 환자의 의식을 확인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더니 그녀는 눈을 깜박이며 알아듣는 눈치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불이 붙더니 차량으로 옮겨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다급히 문을 두드렸지만 심하게 눌린 상태라 열리지 않았죠. 저도 함께 열어보려 했습니다만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 보니 문이 약간 벌어진 틈으로 운전자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빠져나오려고 애를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전벨트가 엉켜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죠. 급히 칼을 꺼내 벨트를 자르고 운전자분을 끌어내었습니다. 그녀가 차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다시 거대한 충격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없습니다. 깨어보니 이곳에 구급차 안이더군요." 옆을 지키던 다른 구급대원이 설명을 이어나갔다. "환자분은 불에 타는 고통 때문인지 금세 의식을 차리곤 어떻게든 기어 나오려 애를 쓰셨습니다. 저희는 급히 달려가 불을 껐지만 이미 화상이 너무 심한 상태였어요."
그때 응급실로 낯이 익은 몇 사람이 우르르 뛰어들어왔다. 뭔가 이상했다. 그중 한 사람은 그녀의 오빠였다. 며칠 후에는 매형이 될 사람이었다. 그녀는 평소에 오빠 명의의 차를 타고 다녔다.
그녀의 집에 도착한 경찰은 목이 부러진 채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 시체 한 구를 발견했다. 그는 결혼식 준비로 모두가 집을 비운 틈을 타 그녀의 집에 들어가 목을 맨 것 같았다. 아직 잉크도 마르지 않은 유서가 자살이라는 것을 확실히 증명해주었다.
영상통화 속의 그는 천장에 매달린 줄에 목을 건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남들이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 미쳤어? 당장 안 내려와?" 화면 속의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네가 날 버린 거야. 네가 날 죽인 거라고. 넌 후회 속에 살아. 난 갈 테니. 안녕."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면이 크게 흔들렸고 천정의 한쪽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끊어지지 않은 스피커로 누군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컥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화를 끊은 그녀는 아연한 표정으로 급히 찾아올 것이 있다며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이별통보 후 그의 전화를 애써 무시해온 그녀였지만 결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그동안의 관계를 매듭지으려 받았던 전화였다. 수차례 죽겠다 협박했던 그였지만 미친 소리라며 무시했는데 정말 자살이라니. 그것도 하필...
그녀는 미칠 것만 같았다. 고운 입에서 욕이 쏟아졌다. "미친 새끼. 대체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서 지랄이야!!" 앞에서 기어가는 차량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초보운전' 딱지가 붙어있었다.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운전 못하면 집에나 있지 이 복잡한 시간에 운전연습이냐..." 초조해진 그녀는 페달을 밟지 않은 왼 발을 동동 굴렀지만 아파트 사이사이로 난 왕복 1차선 도로는 더디기만 했고, 노인보호구역과 아동보호구역으로 뒤덮인 탓에 내비게이션은 속도위반 경고음만 반복해댔다. "제발 좀 가자... 좀!" 같은 길에서 3번째 신호를 기다리던 그녀는 결국 뭔가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과 함께 중앙선을 넘고 있었다. 길게 서 있는 차량들 옆으로 내달리던 그녀는 횡단보도로 뛰어나오는 아이를 피하려 핸들을 급히 꺾었고 기다리던 차의 보닛과 부딪혀 공중으로 붕 떴다. 몇 바퀴를 데굴데굴 구르던 그녀의 차는 뒤집어진 채로 사거리 한복판에 멈춰 섰고, 갑작스러운 사고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던 행인들은 일제히 스마트폰의 긴급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에게 남자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을 아는 여자였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며 살아왔다.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어차피 한 남자만을 사랑할 수 없는 성격이었고, 나 역시 그녀에게 그런 순수한 사랑을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선택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 '남자'였다. 정적을 처리하는 것은 수컷의 의무였다. 나는 그를 찾아가 더 이상 그녀에게 찝쩍대지 말아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는 내게 그녀의 마음도 당신과 같냐고 되물었다. 나는 그녀의 마음은 이제 상관없다고 말했다. 어차피 그녀는 나와 결혼하기로 했고 당신의 쓸데없는 미련은 그녀를 바람난 유부녀로 만들 뿐이라고. 그는 대답하지 않고 무심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고 돌아왔던 그 날이 일주일 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지가 사랑하던 여자 집에서 죽을 생각을 하냐. 등신 머저리 같은 새끼!" 그녀가 남자 보는 눈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잖이 불쌍해 보이는 놈들만 만나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런 지질한 새끼가 뭐가 좋다고 잊지를 못하니. 휴..." 담배연기로 화장실 내부가 뿌옇게 변했다. "요즘도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놈이 있네" 몇 칸 너머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었다. 짜증이 치솟으며 담배에서 쓴맛이 났다. 절반 이상 남은 담배꽁초를 변기 속에 던져버리고는 카악 하고 침을 뱉었다. "내 참 재수가 없으려니까." 물을 내리고 나오는데 마침 그 칸에서 있던 사람도 나왔다. 나는 한차례 눈을 부라리곤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더럽게 맑았다.
그녀는 내가 처음으로 사랑한 여자였다. 나 좋다고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다. 전화 안 받는다고 징징거리는 것부터가 딱 짜증 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느 여자들과 달랐다. 그녀는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우연히 바에서 혼자 있는 그녀에게 처음 다가갔던 날, 그녀는 내게 만나는 남자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있어도 상관없다고 했다. 그 남자 꼴 보기 싫을 때만 나와 만나자고 했다. 그녀는 대략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전화번호를 쓴 쪽지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연락이 온 건 한 달쯤 뒤였다. 술에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별 기대감 없이 나간 자리에서 그녀와 나는 밤새 술을 마셨고 같이 잤다. 다음 날 그녀는 이딴 걸로 날 엮을 생각 하지 말라고 하곤 사라졌다. 일주일, 사흘, 2주, 두 달. 그녀는 때때로 내게 연락을 했고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2년쯤 지났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술에 취하지 않은 모습을 봤다. 그날 나는 청혼을 했고, 그녀는 0.5초도 생각하지 않고 싫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했고 그날도 우린 같이 잠을 잤다. 그 후로 나는 만날 때마다 결혼하자고 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그녀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5년이 지났고 둘 다 서른이 됐다. 그녀는 이제 좀 정착하고 싶은데 남자가 없다고 했다. 나는 반지를 내밀었다. 너를 만날 때마다 갖고 다녔다고. 3년 동안. 그녀는 이제 장난 그만하라고 했다. 난 단 한 번도 장난이었던 적 없었다고 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내 청혼에 '싫어'라고 대답하지 않았던 것은 그 날이 처음이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그녀는 내게 반지를 하나 내밀었다. 그녀가 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의 반지였다. 이게 뭐냐고 묻는 내게 그녀는 "그거 한 번 껴봐"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반지를 꼈다. 그녀가 물었다. "잘 맞아?" "좀 끼는데?" "살 빼" "근데 뭐야 이거?" "전에 네가 준 반지는 내 스타일 아냐. 내가 너한테 반지 받을 이유도 없고, 그 반지 손에 안 맞으면 이대로 끝내려고 했는데 손에는 들어간다니 선택권은 너에게 줄게. 낄지 말지는 네가 정해. 그걸로 이 지루한 결혼 싸움도 그만하자." 난 당연히 반지를 빼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들어 보란 듯이 그녀에게 내밀었다. 피식 웃은 그녀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처음 보는 수줍은 표정도 예뻤다. "너 내가 그렇게 좋냐?" 나는 과장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있다며 한 달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찾아간 건 그 이후였다.
그 새끼는 목숨을 걸고 우리 결혼식을 파토내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결국 그는 내게서 그녀를 빼앗아가는 데 성공했다. 정적을 제거하는 싸움에서 진 것은 나였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을 결혼식을 며칠 앞둔 지금, 내가 근무하는 응급실에서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