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그녀

창조의 그늘 아래

by 작가 전우형

눈보라와 함께 심장이 멎었다. 멈춰버린 시곗바늘을 본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조롱하는 세상. 생명은 이토록 무가치했던가? 손끝에 온기가 남아있었다. 흐트러진 동공은 초점이 없었고 흰자위는 혈색이 완연했다. 피로 물든 손은 축 늘어져 힘 없이 덜렁거렸다. 손목그려진 납빛 손자국만이 마지막 생의 열망을 증명하는 듯했다.


운명의 절벽 끝에 선 한 여성. 남은 삶의 무게만큼이나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의 질량은 가볍고 보잘것없었다. 날 선 의식은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황량했고, 숨소리는 가냘프고 생기가 메말라 있었다.


그녀가 모습을 감춘 것은 어젯밤 무렵이었다. 오래 머물 것이라 예상하지 않았지만 떠나는 시점이 그날 밤이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흔적은 정리했고, 그녀가 머물던 방은 침입으로부터 안전했다. 어떤 경로든 침입자는 한 가지 이상의 보안장치를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방을 빠져나간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바깥은 여전히 사람이 다닐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눈보라가 잠잠해지기 전까지는 그녀는 이 곳을 떠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저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녀는 제 발로 거처를 떠난 거야. 더 이상 골치 아픈 여자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의 바람은 종종 바람을 비웃고, 그녀가 머물던 방의 흔적은 그런 나의 소망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그녀와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었다. 짙은 눈보라 끝에 쓰러진 그녀에게 하루 묵을 방을 내어준 것이 전부였다. 그녀를 구한 것은 아름다워서도 안타까워서도 아니었다. 어떤 사정으로 눈보라를 뚫고 인적 드문 산골의 오두막 앞에 쓰러져 있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를 내버려 두지 못했던 것은 일시적인 변덕과 충동 때문이었다. 반경 10km 내에 다른 인가는 없었다. 내가 모른 채 지나치면 1시간 내에 동사할 것이 분명했다. 죽어가는 이를 구할 만큼 영웅심 투철한 인간은 아니었지만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는 양심의 가책에서 스스로를 완벽히 보호할 만큼 무디고 단단한 자아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구한 것은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눈을 뜬 그녀에게 말했다. "안심하세요. 당신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을 테니. 당신은 그저 하룻밤 묵은 후 눈보라가 잠잠해지면 가던 길 가면 됩니다." 한 가지를 덧붙였다. "머무는 동안 방을 벗어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이 방을 벗어나면 어떤 식으로든 경보가 울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새도 없이 쓰러지듯 잠들었다. 대꾸할 여력도 부족해 보였다.


그런 그녀가 사라졌다. 모든 정황은 그녀가 끌려갔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추적자는 그녀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차린 걸까? 어떻게 이곳에 침입했을까? 보안시스템이 간파당했거나 그녀가 협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역시 괜한 짓을 한 걸까?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게 아니었어. 심지어 그들은 흔적을 지우지도 않았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날 물로 보나 보군. 기왕에 끼어든 일 끝까지 방해해주지.'


맹렬히 그들을 뒤쫓아간 나는 끌려가는 그녀를 발견했다. 산길을 벗어나지 않는 한 사냥꾼의 속도로 따라잡을 수 없는 존재는 없었다. 그들이 비록 추적의 달인이라고 해도 이 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보다 빠를 수는 없었다. 그를 발견한 나는 천천히 뒤를 쫓으며 그의 체력이 소진되기를 기다렸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걷는 것은 맨몸으로도 무리일 터였다. 하물며 한 사람의 무게를 짊어진 채 눈보라를 뚫고 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를 내동댕이친 그가 나무 등걸에 기댄 채 가쁜 숨을 내쉬는 순간 나는 그를 덮쳐 목을 조였다.


"왜 나를 쫓아온 건가요? 어서 돌아가세요. 그들은 당신이 상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에요." 몇 마디 말을 내뱉는 것으로도 그녀는 힘겨워했다. "그들이 어떻게 당신을 데려간 것인가요? 내 거처는 아무나 침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 정도로 허술했다면 나는 진작에 사라지고 말았을 거예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저를 데려간 것이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그곳을 떠난 거니까요." "믿을 수 없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당신이 손쉽게 빠져나갈 만큼 허술하지 않아요." 시체처럼 창백하던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감정이 스쳤다. 치기어린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그것이었다. "당신은 자신감이 넘치는군요. 그곳에 설치된 보안장치가 아무리 대단한 것이었다고 해도 앞으로는 당신을 지켜줄 수 없어요. 이제 당신은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하는군요. 저는 평생 동안 그 집에서 살아왔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삶은 상상해본 적도 없죠. 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저는 제 집을 지킬 겁니다." "당신은 제가 어떻게 그곳을 벗어난 건지 궁금할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저는 그저 그곳을 천천히 걸어 나왔을 뿐이에요. 그렇게 노려보아도 바뀔 건 없답니다. 거짓이 아니니까요."


"당신은 평생 동안 그 집에서 살아왔다고 했죠?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는지 기억할 수 있나요?"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그녀가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답할 수 없을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 집과 함께 만들어졌을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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