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위층에 엘리베이터가 멈췄고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입구의 작은 틈으로 희미하게 빛줄기가 스치는 것이 보였다. 양쪽으로 문이 열리며 직육면체의 공간이 드러났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엘리베이터에 누가 타는 것 같았는데?' 사람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찜찜함이 뇌리를 스쳤지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었다. '잘못 눌렀던 거겠지. 아니면 눌러두고 잊은 것이 있어 돌아갔거나.' 나는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올라 숫자 '1'이 새겨진 버튼을 눌렀다. 벽면의 대부분을 덮은 거울 속으로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는 모습이 비쳤다.
몸이 살짝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엘리베이터 상단에 설치된 LCD로 빨간 숫자가 하나씩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 숫자가 '15'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 묵직한 중력이 느껴지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LCD에 표시된 숫자는 '14'를 가리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다음에 탈 사람을 생각해 오른쪽 구석으로 물러났지만 바깥에는 아무도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 통로의 어두컴컴하고 냉랭한 공기만이 나를 반길 뿐이었다. 혹여나 뒤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을까 '열림' 버튼에 손을 대고 기다렸지만 결국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요즘도 이런 장난치는 사람이 있나 봐!" 일부러 평소보다 조금 큰 목소리로 투덜거린 나는 '닫힘'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시 버튼을 수 차례 두드렸지만 '탁탁'거리는 소리만 날 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이 닫힐 때까지의 5초 정도의 시간이 1시간처럼 느껴졌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네 주민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게 바로 어제였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겼을 일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여졌다. 조금이라도 1층에 빨리 도착했으면 하는 마음이 앞섰지만 우두커니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시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출발했다. 이런저런 생각이 맴돌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났나? 그냥 걸어서 내려갈까? 에이, 그렇게까지 할 건 없겠지.' 운동삼아 걷는 것이라면 모를까 그까짓 소문을 의식해 도망가는 것이 탐탁지 않게 여겨졌다. 심하게 목이 타고 어지러웠다. '얼마나 남았을까?' 시선을 옮겨 층수가 표시되는 LCD를 바라보았다. '엇?' 숫자가 여전히 14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생각에 잠겨있느라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지 않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것 같지는 않았다. 상황을 살피기 위해 엘리베이터 내부를 쓱 훑어보았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로로 쭉 나열되어있는 버튼 중 어떠한 것도 점등되어있지 않았다. '분명 1층이 눌러져 있었는데?'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음각으로 '1'이라고 새겨진 버튼을 눌렀다. 숫자가 새겨진 부분이 주황색으로 점등되며 엘리베이터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LCD의 숫자가 하나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14, 13, 12...'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번에는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줄어드는 숫자를 마음속으로 함께 세고 있었다.
'8'을 지날 때쯤 다시 한번 중력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숫자가 '7'로 바뀌었고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역시나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반복되는 상황에 짜증이 치솟았다. '역시 뛰어내려 가야겠어.' 하고 생각했지만 마르지 않은 시멘트를 밟은 것처럼 발걸음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함이 맴돌았지만 어떤 방법도 그것을 걷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작동되지 않는 '닫힘' 버튼을 강박적으로 눌러봤지만 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을 충분히 기다린 엘리베이터는 그제야 양쪽으로 열려 있던 문을 서서히 닫기 시작했다. 손바닥을 문에 대고 닫히는 방향으로 힘껏 밀었다. 초시계로 재어보진 않았지만 문이 조금 더 빨리 닫히는 기분이 들었다. 문틈 사이로 손이 불쑥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호흡이 멈췄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렸다. 문은 그대로 닫혔다. 누군가 문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지 않았다. 1층 버튼은 또 불이 꺼져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1층 버튼을 반복적으로 눌러댔다. 버튼은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고 다음 층에 다시 섰다. 문이 열렸고 아무도 없었다. 온몸의 털끝이 모두 곤두서는 느낌과 함께 소름이 쫘악하고 돋아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계단을 뛰어내려 갔다.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빛이 보이는 방향으로 달렸다. 1층 공동현관으로 뛰쳐나온 뒤에야 호흡이 터졌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경비실을 향해 내달렸다.
저간의 상황을 전해 들은 경비아저씨는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이전에도 엘리베이터가 이유 없이 멈춰 선다는 신고를 받고 확인하려 갔는데 아무 이상도 없었다. 이후로도 두 차례 같은 내용의 주민 신고가 접수되어 업체에 안전점검을 의뢰했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작동 테스트 결과도 '이상 없음'으로 나왔다.' 그래도 엘리베이터가 이유 없이 멈추는데 그대로 둘 수는 없지 않냐고 따져 물었지만 경비아저씨도 딱히 방법이 없는 눈치였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잡았다고 했죠?" "네! 분명히 누군가 손을 뻗어 문을 잡으려고 했어요." "그때가 몇 시쯤이었죠?"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몇 분 안 지났을 거예요." "그럼 CCTV 화면을 확인해보시죠." 경비아저씨는 능숙하게 화면을 조작했다. 화면 속에 한 사람이 보였다. 하지만 외양이 생소해 보였다. 그 사람은 분명 내가 아니었다. "이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좀 전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으면 이게 맞을 텐데..." 경비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화면을 조작하려고 할 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화면 속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복장이나 생김새로 보아 분명 나였다. 경비아저씨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아까 엘리베이터에 아무도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CCTV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분명 제가 탈 때는 아무도 없었는데..." 경비원은 화면 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화면에 보이는 이 사람은 누군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때 화면 속의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버튼을 마구 눌러대던 내가 갑자기 뒤에 있던 사람을 거칠게 밀며 구석으로 몰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CCTV 화면이 상하로 흔들리며 아래쪽 끝으로 어지러이 뒤섞이는 두 사람의 정수리가 보였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비명소리가 경비실 내부를 가득 채웠다. 맞은편의 커다란 거울 속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마구잡이로 찔러대는 장면이 비쳤다.
화면을 조작하던 경비원의 손이 멈추고, 경비실 내에 정적이 맴돌았다. 정적을 깨는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경비원의 눈이 부릅떠졌다. "끄윽..." 부르르 떨며 답답한 신음소리를 내는 그의 목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것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아직 식지 않은 뜨거운 피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몇 차례 쿨럭이던 그는 거친 몸부림도 잠시, 눈동자의 빛을 잃으며 허물어졌다. 그런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단도가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움켜쥐고 있던 나는 그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은 것을 확인한 뒤에야 손에서 힘을 뺐다. CCTV 화면 속에는 살인을 마친 후 몇 차례 다른 층에 엘리베이터를 세우던 내가 미친 듯이 달려 나가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경기도 00 아파트에서 발생한 엘리베이터 연쇄살인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뒤로 보이는 아파트에서 바로 어제 살인을 저지른 최 모 씨는 대담하게도 다음 날 같은 아파트에서 살인을 저지른 뒤 경비원을 살해하고 CCTV 영상을 탈취해 달아났습니다. 경비원의 처참한 모습은 교대시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는데요. 경찰은 정확한 살해 시점을 추정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단도에 지문이 그대로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아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초범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인데요. 신원조회 결과 그는 특이한 정신증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분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한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웃는 거지? 지금 상황이 웃긴가?" 그는 웃음을 멈추고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럼 웃어야지, 눈물이라도 흘릴까?" 히죽거리는 그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작은 떨림이 묻어 나왔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어떡하긴. 자수해야지. 자수하지 않아도 넌 곧 경찰에 붙잡힐걸?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난 낮게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난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난 그저... 엘리베이터에 탔을 뿐이야. 그 외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 "흥! 사람들이 네 말을 믿어줄까? 어차피 네가 하는 말 따위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잖아? 네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은 나뿐이야. 나는 너, 너는 나라고." 거울 속의 남자가 말을 이어갔다. "넌 살인자야. 그걸 인정해.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