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라는 것은 유독 하고 싶어지는 이유

호기심과 시기심이라는 동전의 양면

by 작가 전우형

* 저의 신앙과 기독교적 색채가 담긴 글입니다. 다만, 신앙의 관점을 떠나 여러분께서 생각해보시면 좋을 내용이니 많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차분히 읽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인간의 원죄를 언급할 때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선악과 사건이다. 에덴동산에 있는 것들 중 선악과만은 손대지 말라는 신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하와는 결국 뱀의 꾐에 넘어가 선악과를 베어 물고 만다.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인간의 원죄가 시작되었다고 성경을 비롯한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잘못된 선택을 말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라는 운명적인 결론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담과 하와뿐 아니라 어떤 인간도 신의 명령을 받은 즉시 그것을 어기려 애쓰거나 누군가의 꾐에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셀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을 보냈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에덴동산에 존재하던 것 중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것들에 대한 탐구를 마쳤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선악과 하나만이 남아있다. 그것만은 절대 손대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바로 그것만이. 이때 누군가가 다가와 작은 속삭임으로 굳은 결심을 흐트러트리거나 '가장 좋은 것을 네게 주지 않으려는 거야.'라며 의심을 불어넣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필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하지 말라는 것은 왠지 하고 싶어 지는 인간의 속성. 그것은 실험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기숙사 방 중 하나를 지정해 '절대 열어보지 마시오'라는 팻말을 붙인 후 카메라를 설치하고 상황을 지켜본 실험이 있었다. 학생들은 팻말이 붙어있지 않은 방은 망설임 없이 지나쳤지만 열어보지 말라는 팻말이 붙은 방 앞에서만큼은 망설이고 서성거렸다. 주위를 살핀 후 보는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 서면 하나같이 슬쩍 문을 열고 방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았다. 당연하게도 그 방 안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학생들은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호기심을 누르지 못했다. 이 실험은 인간의 호기심을 억누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실히 확인시켜주었다.


같은 상황에서 개인의 인내심 수준에 따라 한 번, 두 번, 열 번, 스무 번, 백번까지는 선악과에 대한 호기심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떨까? 천 번, 만 번 그 앞을 지나치고도 평생에 단 한 번도 선악과를 확인하고픈 마음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을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까? 선악과 사건은 하와가 특별히 유혹에 약하고 인내심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언젠가 한 번쯤은 결국 저지르게 될 운명적 실수를 상징하고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인간은 결국 선악과에 손을 댈 수밖에 없을까? 왜 인간은 열어보지 말라는 방문을 반드시 열어보게 되는 걸까? 첫 번째는 호기심이다. 호기심은 존재나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을 말하며, 사물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질문하는 태도나 성향을 말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호기심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특성’이라고 주장했고, 아인슈타인은 “나는 천재가 아니다. 다만 호기심이 많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호기심은 질문을 던지게 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탐구활동을 제한하는 모든 것은 호기심과 대치를 이룬다.


한편 호기심은 양날의 검과 같아서 과도한 호기심은 화를 불러일으킨다. 판도라의 상자는 호기심이 불러일으킬 재앙을 잘 보여준다. 제우스가 모든 죄악과 재앙을 넣어 봉한 채로 판도라를 시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낸 것이 ‘판도라의 상자’였다. 하지만 판도라는 열어보지 말라는 제우스의 명령을 어기고 호기심이 생겨 상자를 여는 바람에 인간의 모든 불행과 재앙이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판도라는 당황한 나머지 급히 상자를 닫았고, 그 결과 ‘희망’만이 상자 속에 남아 있게 되었다. 이것을 신화에 등장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의미를 축소시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결코 작지 않다. 특히 호기심은 곧잘 시기심과 결합되어 파괴적인 공격성의 원천이 되기 때문에 조심하고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두 번째는 시기심이다. 시기심은 남이 잘되는 것을 시샘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며, 누군가 좋은 것을 통제한다고 느낄 때 분노하거나 공격성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자기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조롱하거나, 탐나는 무언가를 소유하고 즐기는 누군가에게 분노하고, 그가 가진 것을 빼앗거나 훼손하는 방식으로 몰락을 지켜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는 감정이기도 하다. 시기심은 호기심과 형제간이어서 로마의 희극작가 플라우타스는 “시기하는 사람 치고 호기심이 많지 않은 사람은 없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격경쟁을 하는 주유소 업주는 늘 옆 주유소 가격을 힐끔힐끔 들여다보며 1원이라도 낮게 단가를 표시하기 위해 애쓴다. 그가 옆 주유소 가격을 확인하는 속내 중 어디까지가 시기심이고, 어디서부터가 호기심일까? 이처럼 호기심과 시기심은 분리하기 어렵다. 열어보지 말라는 방 문을 기어코 열어보는 것은 그 방에 있는 무엇이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개해서는 안 될 남다른 무언가를 홀로 독차지하려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과 그런 의도를 무너트리고 나만 손해보지 않으려는 시기심의 발로이기도하다.




대개 누군가를 무너트리기 위해선 그에 대해 세밀한 파악이 필요하다. 목적은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고, 시기심 또한 인간 행동의 충분한 목적이 된다. 유명 연예인이나 권위자에 대한 작은 흠결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중의 모습은 이러한 시기심의 작용과 관계없지 않다. 내가 갖지 못한 명예와 권위, 그리고 유명세는 부러움과 시기심의 대상이 되고, 대중은 그들을 경외하고 겉으로는 존경을 표현하는 한편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는 그의 몰락을 바란다.


그러한 바람은 대개 일시적인 기분에 그치지만 마음 저변으로 잔잔하게 흐르던 시기심은 언제나 일어날 계기를 기다린다. 시기심의 램프를 탁 하고 점등시켜줄 작은 스위치 하나를 찾으며. 시기하는 대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관찰하는 것은 이중적인 인간의 심리를 잘 보여준다. 그리하여 숨겨진 분노는 발화점이 낮다. “역시 내 그럴 줄 알았어. 겉으로는 그렇게 사람 좋은 척은 다 하더니. 세상에나, 완전 위선자였잖아!” 그간 경외와 존경을 품었던 자신에 대한 억울함을 한껏 분출하며 분노하고 질타한다. 때로는 그러한 의혹 제기나 보도의 사실 여부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억압되어 있던 내면의 공격성을 완전히 해방시키고는 훗날 바로잡고자 하는 노력은 외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설사 그처럼 충격적이지는 않더라도 그도 나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남몰래 안도한다. 내가 특별히 다른 누군가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감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감정이지만 대놓고 표현하기는 더욱 어려운 감정이다. 대중의 시기심과 분노, 공격성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악의에 찬 시도들은 대중 스스로 그것들로부터 거리를 두지 않는 한 사라지기 어렵다. 특히나 한국인은 호기심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 기웃거림과 잦은 눈팅이 무자비한 시기심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생각과 태도, 감정을 잘 다스릴 필요가 있다.


인간의 원죄를 갖고 태어난다는 기독교적 가르침은 단순히 인간이 먼 조상의 잘못으로 인해 죄를 짊어진 채 태어났고, 그렇기에 회개해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 원죄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유한 한계를 꼬집는 말이자 어느 정도는 필연적으로 도달할 가깝고도 먼 미래의 한 시점을 지목하는 말이기도 하다. 호기심과 시기심은 동전의 양면이며 불가분에 가깝다. 이것은 인간이 호기심과 시기심을 적절히 분리하여 사용하기 어려움을 간접적으로 표현해준다. 결국 인간이 인간을 사랑으로 대하지 못하고 분노와 시기, 질투로 대할 때 그 배경에는 원죄가 존재한다. 가급적 스스로의 힘으로 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신앙의 힘을 빌리는 것도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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