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에 대하여 생각하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딜레마에 빠질 때가 종종 있다. 딜레마는 진퇴양난에 빠졌음을 의미한다. 생각이 정리되지 못하고 논리를 상실해 패닉이나 공황상태에 빠진 것처럼 어떤 선택지도 선택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딜레마에 대한 예를 들 때 가장 흔하게 등장하는 것이 ‘트롤리 딜레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이며, 여러 심리학 강연에서도 많이 쓰이는 예시다. 개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정지할 수 없는 트롤리 기차가 선로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선로 앞에는 선로를 공사 중이던 인부 5명이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트롤리 기차는 다섯 명의 인부를 필연적으로 죽이고 말 것이다. 하나의 선택지가 있다. 이 레버를 당기면 기차는 다섯 명의 인부를 죽이기 전에 선로 변경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쪽 선로에도 인부 한 명이 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이 레버 앞에 있다면 과연 레버를 작동시킬 것인가? 작동시키지 않을 것인가?
이 문제의 응답자 중 89%가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여기서 문제의 내용이 살짝 바뀐다. 당신은 선로가 보이는 육교 위에서 트롤리 기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고 있다. 상황은 마찬가지로 이대로 가다가는 5명의 인부가 죽게 생겼다. 다만 이제는 선로를 변경시킬 레버 따위는 없다. 유일한 방법은 무거운 것을 떨어트려 기차를 멈추는 것뿐이다. 당신의 옆에는 덩치가 크고 뚱뚱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 한 명을 선로에 떨어트리면 확실히 기차를 멈출 수 있다. 당신은 이 사람을 육교에서 밀어 선로에 떨어트리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답변이 엇갈린다. 응답자들의 78%가 뚱뚱한 사람을 육교 아래로 밀어서는 안 된다고 응답한 것이다. “당신은 왜 아까와 같은 선택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문제의 본질은 같이 않나요?” 와 같은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지고, 이제는 레버를 작동시킬지에 대한 선택도 내릴 수 없게 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딜레마’다.
두 가지의 문제는 세부 내용이 일부 변경되었지만 본질은 같다.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희생할 것인가의 문제다. 레버를 당길 경우에도 한 명의 인부는 죽고, 육교에서 덩치 큰 사람을 밀어도 한 명의 사람은 죽는다. 대신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응답은 다르다. 첫 번째 문제에서는 레버를 당기겠다고 했지만, 두 번째 문제에서는 그 사람을 밀지 않겠다고 한다. 이 같은 차이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 속에서 흔히 딜레마에 봉착한다. 식당에서 한 아이가 시끄럽게 떠들며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부모는 아이를 조용히 하도록 지도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서서 그 부모에게 아이를 조심시키라고 말을 할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
나 역시 아이를 키워본 입장에서 아이를 기죽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양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만 식당은 분주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며 직원들이 뜨거운 음식이나 깨지기 쉬운 그릇처럼 위험할 수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나르고 있는 곳이다. 뛰어다니다가 누군가와 부딪히기라도 하면 누군가 다칠 수 있다. 이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아이를 제지시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이 내 아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지적하는 것이 대단히 기분 나쁘고 속상하는 일일 수 있다. 내가 괜히 나서 상대방과 불필요한 갈등을 겪거나 즐거운 식사를 망칠 수 있다. 그저 나와 관계없다고 생각하고 식사나 즐기는 것이 현명할 것 같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딜레마에 봉착한다. 엄밀히 말해 딜레마란 어떤 선택도 내릴 수 없는 상태, 선택의 감옥 안에 갇혀버린 상태와 같다. 트롤리 딜레마와 같이 누군가가 죽고 사는 치명적이고 절박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일상적으로 겪는 가벼운 갈등일 수도 있다. 딜레마 상황은 우리의 내면에서도 나타난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지만, 대외적으로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한다. 변덕스러운 자신의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다. 성숙하고 완벽한 인간으로 포장해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과 이성의 지렛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저울질을 반복하며, 비합리적이고 때로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벗어난 결정을 하며 혼란스러운 내면을 가진 존재다. 그렇기에 머리가 복잡해지고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늘 고민에 빠진다. 어제는 떡볶이가 먹고 싶었지만 오늘은 국밥이 먹고 싶다. 어제는 건강이 최고라고 느껴졌지만 오늘은 술자리에서 진탕 마셔보고 싶다. 항상 정의롭고 대의를 추구하는 모습만 보이고 싶은데 속으로는 시기심과 질투가 불같이 인다. 그래서 혼란스럽고, 그래서 인간이다.
트롤리의 딜레마에서 사람들의 선택이 달라진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자신의 현재 행동이 만들어내는 결과가 직접적으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는가, 아닌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의 결정 과정이 일관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머릿속에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생각 등을 관장하는 뇌와 감정, 본능, 순간적인 반응 등을 만들어내는 뇌가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 구조는 내부에서부터 외부로 나올수록 진화과정에서 나중에 발달된 것으로 뇌 깊숙한 곳에 위치한 편도체는 ‘파충류의 뇌’, 또는 ‘감정 뇌’라고도 불리며, 감정과 정서 등을 담당한다. 하지만 보다 고차원적인 사고, 즉 우리가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 활동들을 관장하는 곳은 뇌의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전전두엽으로 ‘생각하는 뇌’라고도 불린다. 편도체는 약 3살 정도의 지능을 갖고 있으며 상상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실제 하지 않아도 귀신이 있을 거라는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느낌과 함께 공포를 느끼며 꼭 즐거운 일이 없더라도 의도적으로 크게 웃거나 웃는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안면근육의 변화, 웃음소리 등을 느껴 실제로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은 편도체가 가상과 실제를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감정을 자극할만한 상황에 놓이면 편도체가 우선적으로 활동하는데, 트롤리 딜레마의 두 번째 질문에서 응답자들이 덩치 큰 사람을 밀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은 편도체가 나서서 선택을 주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누군가를 내가 직접 육교에서 밀어야 하는 상황, 그 잔인하고 충격적인 상상에서 우리의 감정, 죄책감이나 공포심 등이 자극되고 이후에 다섯 명의 인부가 죽는다는 사실보다 현재 눈앞에서 내가 사람을 죽인다는 것에 대한 끔찍함이 우리의 결정 과정에 더 강력하게 관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첫 번째 질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레버를 움직여 선로를 변경하는 선택지를 결정한 것은 자신이 해야 하는 행위는 단순히 레버를 조작하는 것뿐이며 나의 행위가 결국 바뀐 선로에 있는 한 인부를 죽이는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당장 나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처음의 전제였던 다섯 명이 죽는 것보다 한 명이 죽는 것이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인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도 응답자들의 뇌 영상을 분석한 결과 처음의 문제에서는 전전두엽이, 두 번째 문제에서는 편도체가 활성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차이는 소비의 과정에도 종종 나타난다. 예전의 거래 방식은 아날로그 방식이었고, 직접 대면해서 현금을 주고받는 방식이었다면 현재의 방식은 인터넷을 통해 숫자가 오가며, 현금을 직접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계좌이체, 혹은 카드결제 등의 방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마트에서 20만 원어치의 물건을 산다고 했을 때 20만 원을 직접 현금으로 한 장 한 장 세어서 지불하는 것과 카드를 긁는 것 사이에는 그 소비의 느낌에 큰 차이가 있다. 같은 20만 원을 사용하더라도 그 돈이 현금이라는 형태로 지갑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직접적으로 볼 때, 소비의 체감 정도는 훨씬 더 커진다. 단순히 200,000원이라는 숫자가 영수증에 찍힌 것을 볼 때보다, 만 원권 지폐 20여 장의 움직임이 훨씬 더 직관적이고 우리의 감정을 움직이며, 이후에 금전 지출에 브레이크를 걸어줄 가능성이 크다. 달리 말하면 현재의 카드결제나 인터넷 뱅킹 방식은 소비자보다 공급자에게 훨씬 더 유리한 경제활동 방식이다. 큰돈을 더욱 쓰기 쉽고 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요즘 흔히 이뤄지는 모바일 게임에서 어떤 아이템을 결재할 때 우리는 단순히 100,000원이 결재되었다 정도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 이 메시지는 큰돈을 쓰더라도 그 당시에는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 가늠할 수 없게 하며, 이것은 과소비로 이어진다. 하지만 만약 매 아이템을 결재할 때 실제로 자신의 지갑에서 그만한 현금을 꺼내서 제출한다면, 그 소비의 느낌은 훨씬 더 직접적이고 충격적일 것이며, 이렇게 돈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더 빨리 들 것이다.
전쟁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은 히로시마에 2발의 핵폭탄이 투하됨으로써 종전이 이루어졌다. 당시 그 핵폭탄의 투하 버튼을 누른 조종사의 상황은 트롤리 딜레마에서 레버를 당기는 사람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한다. 만약 그가 단지 폭탄 투하 버튼을 누르는 방식이 아니라 재래식 전투에서처럼 수십만의 사람을 직접 총으로 쏘아 죽여야 했거나 눈앞에서 사람들이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이처럼 전쟁도 버튼 하나로 이루어지고 군인, 탱크, 군함, 미사일 등이 컴퓨터 화면 속 하나의 심벌로 전시되는 현대전의 양상 속에서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이성적 판단으로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수많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 총책임자였던 아이히만 역시 분명한 딜레마에 빠진 적이 있었다. 자신이 보낸 수많은 유대인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에 안전하게 정착한 것이 아니라, 피가 흐르는 시체더미에 파묻혀 있는 참상을 목격했을 때, 아이히만은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 당시의 죄책감은 분명 그가 더 이상 같은 일을 태연히 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은 고위 간부급 회의에서 또 다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유대인들의 처분을 논하며 단순한 정책결정, 포로의 취급 정도로 태연하게 회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분명한 인간성 말살의 한 모습이지만, 적어도 그곳의 나치 고위간부들은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쟁에 관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 유대인이란 단순한 ‘숫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곳의 분위기를 목격한 아이히만은 다시금 원래의 업무를 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핵폭탄의 ‘버튼’을 누르는 조종사와도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딜레마에 봉착한다. 감정과 이성은 서로 다른 판단을 내리려 하며, 우리는 그 지렛대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한다. 분명 이것은 빠르고 효율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하며, 불필요한 심력 소모로 여겨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감정적이라는 수식어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쁜 표현으로 쓰이곤 한다. 쉽게 휩쓸리고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멀리서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되는 ‘관망자’의 입장에서는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선택으로 보일 수 없는 것이, 현장에 존재하는 사람에게는 절실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만 옳다고 쉽게 단정 짓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복잡하고 갈팡질팡하기 쉬운 존재다. 이것은 어느 정도 진화적으로 필요성이 인정되었기에 아직 퇴화되지 않고 남아있는 인간의 오래된 기능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컴퓨터와 같은 선택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진화에서 더욱 우세했다면, 당연히 편도체는 사라지고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불구덩이 속에 남겨진 아이를 구하러 정신없이 뛰어들어가는 부모의 모습은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관람객’의 입장에서 차분히 계산기를 돌려보면 답은 나온다. 그곳으로 뛰어들어가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지만 인간은 종종 계산기를 두드려서는 도무지 나오지 않을 선택을 한다. 감정이 이성을 마비시킬 때 때로는 계산이 안되고, 불가능에 가까운 일들이 이루어지며, 평소라면 생겨날 수 없는 용기와 인류애가 발산된다. 이것은 인간의 삶에 추측할 수 없는 가능성을 부여해왔고 커다란 전환점을 만들어왔다. 대체로 혁명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간은 이처럼 우연에 의지해 지금까지 생존해왔다. 적어도 감정은 죽음 앞에 솔직하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도 계산기를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인간은 여전히 감정적이다. 그 ‘자신’의 카테고리 안에 다른 여러 존재를 포용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른이라 부르고, 부모라 부른다.
끝없이 딜레마에 빠지고 고민을 거듭하면서도 한 발자국씩 전진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복잡성 때문이다. 인간은 뿌리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지향해왔다. 우리의 내면에는 여러 가지 존재가 공존한다. 그것은 비단 ‘감정’과 ‘이성’ 뿐만이 아니다. 어른이 되었어도 어릴 때 형성된 자아는 여전히 남아있다. 남자로서 사회화되었어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여성성이 여전히 기능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면의 다양성을 유지해야만 한다.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반응’이 아니라 ‘사고’를 통해 결정하고 행동에 옮겨야 한다. ‘넛지’에서도 언급한 ‘부드러운’ 접근은 바로 이런 유연한 사고 과정을 의미한 것이다.
그래서 삶은 참으로 다채롭고 살아볼 만하다. 인생의 물결은 매일이 다르며, 아침의 밥맛은 그날그날 다르다. 우리는 독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버튼을 누르는 식의 결정만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내리는 결정이 불러올 결과를 직접 대면했을 때 과연 나는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만 한다. 결국 내가 만족할 수 없는, 한쪽에 치우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지라도, 그 고민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팔색조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 되고, 상황에 맞게 유연한 사고를 하면서도 때로는 감정의 움직임과 직관에 몸을 맡기는 대담성을 띄어야 한다.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에 굳이 이유를 만들려고 하지 말자. 그저 어떠한 선택도 수많은 ‘내’가 내린 결정임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극복하고 더욱 성장하고 단단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