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온종일

by 작가 전우형

운명을 믿는 편이었다. 내 삶의 궤적이 초월적인 무언가에 의해 이미 그려져 있다는 믿음은 매 걸음에 담긴 무게를 덜어주었다. 모든 것이 내 책임은 아닐 거라는 위안이. 단지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것뿐이라면 순간순간이 좋든 나쁘든 기뻐하거나 절망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무릎에 얼굴을 묻고 눈물 흘리는 순간에도 자책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이 모든 게 내 탓은 아닐 거야. 운명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녀가 나를 떠난 것도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우리의 이별은 우리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우리 두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을 거야. 아무리 노력해도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었던 거야. 그래서 슬프지 않았다.


앞에 놓인 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서일까. 잔은 처음처럼 가득 차있었지만 차갑게 식어있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남은 미련을 삼키듯. 미련? 우스운 단어다. 내게 어떤 미련이 남아있는 걸까? 운명 탓만 했던 주제에.


믿음은 종종 배신한다. 자신에 대한 믿음은 특히 그렇다. 나는 나에 대한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그 속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올 공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런 내 곁에 늘 머물러주었다. 차갑게 닫힌 문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려주었다. 그녀의 기다림은 길었지만 나의 사랑은 짧았다. 받기만 하는 사랑은 깊이를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얼마나 나의 마음 깊숙이 존재하는지 알지 못했다.


빈자리는 식어버린 커피잔처럼 허전하다. 지금 내 앞의 빈 의자도 그렇다. 문이 열릴 때마다 빈 의자가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린다.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그녀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나는 그녀를 그리워할 자격이 없다. 나는 그저 운명을 기다릴 뿐이다. 여전히 나는 얄궂은 운명에 기대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고 싶은 순간은 언제나 멀리 있었다. 세상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졌다가를 반복했다. 그의 목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사진 속 그는 웃고 있었다. 그의 눈은 나를 바라보고 있지만 사실은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서로를 겉돌았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었다. 함께 있을 때도 우린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따뜻했지만 나의 손은 차가웠다. 우린 서로 많은 것이 달랐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아니, 좋아해 보려고 했다.


좁아질 수 없는 거리는 사랑에 대한 호기심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진공은 어떠한 소리도 전해주지 않았다. 우린 서로의 입모양을 바라보며 상대가 뱉었을 말을 상상했다. 그래서 우린 서로의 마음을 몰랐다. 어쩌면 이 모든 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다가서는 법을 몰랐다고 하기에는 우리 사이는 가깝고도 멀었다. 우린 다가설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다가서지 않았던 것이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싶었다. 빗나가는 사랑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랑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것이었나 보다. 그리움을 꺼내어볼 수 없는 것처럼. 그를 떠난 것은 상처 받기 싫어서였다. 더 이상 열리지 않을 문을 두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언제나 유리벽 너머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는 내가 아니라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늘 내게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이 싫었다. 내가 그와 닮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우린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기까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우리는 웃으며 만났고 웃으며 헤어졌다. 웃고 있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싸우지 않았다고 해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 사이는 미지근한 콩나물국 같았고 얼음이 녹을 대로 녹은 아이스 라떼 같았다.


문이 열리길 기다린다. 문이 열릴 때마다 확인한다. 숨을 삼킨 채 지켜본다. 왠지 안도한다. 그녀가 아니라는 것에. 만나지 않길 바라면서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우연한 만남에 기대고 싶은 걸까. 나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도 못 본채 하며 지나치는 것을. 두려우면서도 궁금한 것이다. 그녀도 혹시 우연한 만남을 기대하며 이곳을 향하지 않을까.


어둠이 내렸다. 나는 밖을 내다보려 했지만 유리창에 비친 것은 온통 나뿐이었다. 그때 그녀가 지나쳐갔다. 그녀는 그저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두 개로 보였다. 둘로 나뉜 그녀의 모습은 하나는 유리창 밖으로, 다른 하나는 유리창 안으로 서서히 멀어져 갔다. 손을 뻗어보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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