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더 이상의 소원은 없을 것 같았다. 목이 타고 입 속이 까슬거렸다. 나는 냉장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거친 손짓으로 물병을 꺼내 들었다. 뚜껑은 쉽게 열렸다. 이중으로 된 스탠 재질의 컵에 물이 채워졌다. 나는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방문 너머로 희미한 마찰음이 들렸다. '그녀가 깨어난 걸까?'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내게서 잠들지 않은 이유를 찾으려 할 것이었다. 그녀는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감시의 눈길이 사라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순간 눈이 감겨왔다. 한참을 달아나 있던 잠이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를 찾기 전에 내가 먼저 침대 위로 올라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누워 곧바로 잠들면 된다. 그녀는 잠에서 깬 듯 뒤척이거나 말을 걸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도 내일 아침이 되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녀가 내게 몇 시쯤 잠들었냐고 물으면 대충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러면 모두가 잠든 후에도 홀로 무언가를 했다는 흔적을 숨길 수 있었다.
창문이 열린 틈으로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스쳐간 오른팔과 허벅지에 얇고도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이러다가는 정말로 기껏 돌아온 잠이 달아나버릴 것 같았다. 나는 양손으로 팔의 바깥쪽 살갗과 어깨를 상하로 비비며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은 채 방으로 향해 잠을 청했다. 다행히 그녀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내가 침대에 눕자 그녀는 살포시 몸을 돌려 나를 향했다. 가볍게 입을 맞추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꿈결을 헤매는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밝은 아침이었다. 창밖의 세상은 온통 아침 안개 천지였다. 그래서 더 눈이 부셨다. 안개는 왠지 빠져들고 싶은 마력을 준다. 하얀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랄까? '바다를 직접 눈으로 본 게 언제였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일들은 송두리째 소거되곤 했다. 건물 하층이 소리 없이 사라지듯 나의 인생은 바닥으로 한 없이 추락했다.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사람들에게 인상 쓸 일도, 날카로운 음성으로 소리 지를 일도 없었다. 무거운 족쇄를 벗어던진 듯 자유로웠다.
여전히 그녀는 잠에 취해 있었다. 그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도 지쳤을 것이다. 살금살금 몸을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왔다. "자기야 어디가?" 잠꼬대에 가까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방문을 닫았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온몸에서 비명을 질렀다. 차라리 반가웠다. 이토록 분명한 아픔은 생의 증거다. 나는 더 확실한 증거를 얻기 위해 속으로 끙끙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어느덧 아픔은 가시고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약간의 활력.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 것이다.
혀와 입천장이 따가웠다. 몸살의 전조였다. 식탁 위에 사과 한 조각이 남아있었다. 겉은 푸석한 모양으로 말라 있었지만 한입 베어 물자 아삭 하는 소리가 났다. 달고도 신 사과의 과즙이 입안을 적셨다. 예전에는 과일을 먹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 증명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까짓 것 챙겨 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건강할 수 있다고!라고 매 순간 온몸으로 소리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 다시 밤. 시곗바늘은 새벽 3시를 지나고 있다. 시간은 결코 정체되지 않아서 내가 보는 시간은 언제나 과거다. 꿈자리는 사납지 않았다. 나는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편이다. 문득 눈을 떴고 다시 잠들고 싶지 않았다. 방해받지 않는 밤이 좋았다. 우연히 얻은 선물 같은 밤을 이대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보통은 내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도 잠이 덜 깬 얼굴로 눈을 뜬다. 오늘도 그런 '보통' 중 하나였다. 잠에서 깬 그녀가 나를 불렀고,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그녀의 양다리 사이에 내 다리가 위치하고 나는 가능한 그것을 더 이상 들어갈 수 없을 만큼 깊은 곳까지 힘주어 밀어 올렸다. 그녀는 가볍게 몸을 움찔거리며 나를 더욱 꽉 안았고 나의 팔은 그녀의 겨드랑이를 지나 등과 허리를 지긋이 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코끝을 간질일 만큼 가까이 밀착되면 그녀와 나는 서로의 품에 기대어 잠이 들곤 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이번에는 잠들지 않았다. 말했다시피 나는 이대로 밤을 과거로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완전히 축 늘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팔과 다리를 밀어내고 천천히 그녀의 몸에서 벗어났다. 그녀는 몇 차례 몸을 부스럭거렸지만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한 듯 나의 비밀스러운 이탈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내게는 다시 잠깐의 자유가 찾아왔다.
자유는 참 부담스러운 말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더욱 그렇다. 사랑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함께 할 때도, 그리고 혼자 있을 때도 자유를 느낀다. 그리고 가끔은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란다. 혼자 세상을 탐닉하길 원하고 어떠한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방해'라는 단어는 사랑하는 사이에서 더욱 미묘하다. 상대방의 세상에 들어가는 것이 '방해'라고 한다면 사랑은 방해와 동의어가 된다. 그래서 '나 혼자 있고 싶어'라던가 '잠깐만 날 방해하지 말아 줄래?'와 같은 말은 상대방을 서운하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서운함을 표현할 때 나는 섬뜩함을 느낀다. 관계가 깨어질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가 가끔 그토록 원하고 좋아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요구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함께'의 무게가 누적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유다. 혼자 있고 싶은 욕구가 상대방을 밀어내고 싶은 것은 아님에도 그 잠깐의 분리가 두렵다. 그것은 역시 나도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방이 조용하다. 이처럼 모든 것이 조용할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있다.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 공상, 상상과 마음을 따뜻하게 때로는 차갑게 하는 감정, 그리고 내장의 움직임과 나의 호흡소리다. 그 소리들을 듣고 있으면 잠시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깊은 공명은 분리되어 있던 나와 하나가 되게 해 준다. 그 충족감이 비로소 나에게서 세상으로 눈을 돌릴 수 있게 한다. 차분한 시선으로 눈앞의 사물들을 천천히 구석구석 뜯어본다. 스쳐 지나가기 바빴던 모든 것들이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잠깐의 고요함은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을 만나게 한다. 나는 그녀만큼이나 이러한 고요를 사랑했다. 눈앞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내 눈으로 쏟아지는 듯한 깊은 집중의 시간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런 행복은 사람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또 다른 색의 아름다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