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담다
어떤 그리움은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갑자기 날아든다. 아직 겉옷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몰아치는 가을바람처럼. 희미한 기억에도 유독 선명한 그녀의 모습. 눈빛과 설렘. 그리움은 세월의 풍화로부터 벗어나 있다. 바람이 잎사귀를 스칠 때면 그녀는 어느새 눈앞이다.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다. 뒤를 돌아본다. 갑자기 현실. 그 차갑고 시린 빈자리가 나를 애태운다.
충족되지 못한 마음의 욕구가 숨구멍을 틀어막는 느낌이다. 창문이 열린 틈으로 서늘한 공기가 참았던 숨을 탁 하고 터트려주었다. 깊은 호흡을 들이켜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외로움을 넘은 차분함이 그리움을 증폭시켰다. 눈을 감았다. 세상과 단절되고 별빛이 저물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순간에도 그녀의 모습 하나만큼은 끝내 남았다.
문득 눈물이 흘렀다. 아름다움은 수명이 짧다. 사랑도 그랬다.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나의 아픔에 집중했다. 마음의 귀가 멀면 이별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정리되지 못한 시골마을 곳곳은 제멋대로 버려진 쓰레기 투성이었다. 요즘 들어 작은 검은색 비닐봉지가 투기의 주를 이루었다. 부피에 비해 묵직한 편이었는데 악취가 코를 찔렀다. 보통의 악취와 달리 음식쓰레기가 부패되는듯한 냄새였다. 두고 볼 수 없어 주워다 버렸는데 오히려 왜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냐며 비난받았다. 이유야 어쨌든 그것도 쓰레기 무단투기라는 것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쓰레기가 동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것과 쓰레기장에 모아진 것 중에서 어느 쪽이 더 나쁜 것인지.
고민해 보았음에도 쓰레기는 역시 흩어져 있는 것보다 한 곳에 모아두는 것이 이로우리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범죄자들을 교도소에 모아두는 이유와 같지 않을까? 쓰레기장은 투기라 안된다니 방법은 오래된 폐가 한쪽 구석에 모아두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았다. 문제는 지독한 악취였는데 두텁고 큰 봉투에 담아 임시로 묶고 그 위에 천막을 덮어두기로 했다.
한적한 도로 곳곳에 작은 비닐봉지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운전 솜씨가 좋은 이는 유유히 그 봉투들을 피해 갔지만 잠깐이라도 다른 데 신경을 팔고 있었거나 어느 쪽으로 꺾어야 그것들을 피할 수 있을지 감이 부족한 운전자들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봉투들을 밟아 터트렸다. 그때마다 비닐봉지에 담긴 끈적하고 물컹거리는 조각들이 비산 되었다. 후속 차량들이 그 조각들을 짓이기고 지나갈 때마다 더 작은 단위로 쪼개어지며 고체인지 액체인지 모를 것들로 변해갔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향기들로 인해 근처 풀숲을 쏘다니던 들고양이들이 도로에 뛰어들었다. 그중 요령과 조심성이 부족한 녀석들이 부주의하거나 미숙한 운전자들에게 치여 도로 위의 시체가 되었다.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능선에서 두 사내가 쌍안경으로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검은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남성이 입을 열었다.
"역시 잘게 쪼개서 도로에다 버리는 게 딱이라니까. 그렇지?"
동의를 구하는 선글라스 남성의 짓궂은 질문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한 남성을 향했다. 그 남성은 쏟아져 나오려는 내용물을 가까스로 억누르느라 사색이 되어 있었다.
"휴... 확실히 그렇긴 하네. 내 정신도 같이 잘게 쪼개져서 저 도로 한가운데에 뿌려지는 느낌이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선글라스의 남성은 간신히 참는 듯하다가 다시 뒤쪽 구석으로 뛰어가는 그의 뒤통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 정신 돌아오려면 한참 걸리겠네. 저렇게 비위가 약해서야 같이 일 하겠어 어디?"
더 이상 확인할 것도 없는 속을 컥컥 거리며 강제로 들여다보는 와중에도 그 말을 들은 남성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가를 거칠게 훔쳐내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젠장. 누가 이런 일 하고 싶다고 했냐고!"
선글라스의 남성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어깨를 으쓱거리며 이죽거렸다.
"그러니까 넌 아직 멀었다는 거야."
안색이 조금은 편안해진 남성이 그를 잠시 노려보다가 도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터널에서 이제 막 빠져나온 차량이 또다시 넝마가 된 비닐조각을 밟으며 지나가고 있었다.
"뭐가 멀었다는 건지 몰라도 나는 네 녀석이 말하는 곳에 한 발자국도 더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도로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던 선글라스의 남성이 히죽 웃었다.
"튕기긴. 그나저나"
선글라스의 남성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눈앞의 남성을 지적하듯이 손가락을 뻗었다.
"너 그 티셔츠는 어쩔 거냐? 이 밤중에 하얀색 티셔츠라니. 아주 광고라도 하지 그러냐?"
하얀 티셔츠의 남성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상의를 살펴보았다. 하얀색 셔츠 위에 작업용 조끼를 걸쳤음에도 그의 상의 곳곳에는 검붉은 자국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선글라스의 남성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재촉했다.
"됐다. 됐어. 말하면 뭐하니. 얼른 남은 거나 처리하고 가자. 갈 길이 멀다."
말하는 동안에도 선글라스의 남성은 검은 봉투 몇 개를 거머쥔 채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 내키지 않으면 거기서 별이나 보고 있어. 그게 너한테 딱이겠다."
하얀 티셔츠의 남성은 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차피 시작한 이상 빨리 끝내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겠지. 그리고...'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비슷하게 생긴 검은 봉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 봉투들 옆에서 혼자 있는 것도 좀...' 하얀 티셔츠의 남성은 크게 한숨을 내쉰 뒤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는 역시 몇 개의 검은 봉투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추억을 잘게 썰었다. 그녀가 이 세계에 남긴 마지막 흔적은 조각조각으로 흩어져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그녀는 이제 나를 더 이상 그리움에 떨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여행을 좋아했다. 나는 그녀와의 마지막 추억을 세상 곳곳에 흩뿌렸다. 그녀도 아마 만족할 것이다. 바깥이 소란스럽다. 사람들은 그녀의 행복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저토록 예의 없는 등장이라니. 역시 그녀를 보내주길 잘했어. 이 세상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아.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