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더러 아무것도 안 하고 버티란 말이야? 이쯤 되면 죽든지 살든지 둘 중 하나를 결정하는 수밖에.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빠져나갈 구멍 하나쯤은 만들어뒀어야 했는데 너무 미련했던 거지. 물에 빠진 사람 함부로 건드는 거 아냐. 사람 살려면 누구 하나 물귀신 만드는 건 일도 아니지. 그게 뭐 생각하고 말고의 문제인 줄 알아? 그냥 저 죽을 처지에 놓이면 가타부타 따지고 계산할 여지가 없는 거야. 일단 살고 봐야지. 그게 생명이고 사람인 걸.
이성은 목숨줄에 여유 있을 때나 걸 수 있는 사치품 같은 거야. 당장 목덜미에 칼날이 들이대어져 있다고 생각해 봐. 정의고 나발이고 부르짖을 수 있겠어? 물론 그 칼이 실제로 네 살갗을 파고들기 전까지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계산식이 떠오르겠지.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아냐. 그게 아니지. 우리 좀 더 솔직해지자고. 이 칼이 진짜 나를 찌를지 말지에 대한 계산이고 예측인 거야. 물론 그 판단에는 칼을 들이댄 사람에 대한 본능적인 평가가 뒤따를 거고. 이 사람이 단순히 나를 위협해 무언가를 얻어내려 할 뿐인지 아니면 그저 살인에 미쳐서 나를 죽이고 말 사람인지 본능적으로 짱구를 굴리게 되어 있다는 말이야.
그 결과에 따라 제한된 행동을 하게 될 거야. 말이 통할 상대 같으면 어떻게든 구슬려서 눈앞의 칼을 치우게 하겠지. 하지만 그럴 기미가 없다면? 사기를 치든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든지 간에 어떻게든 저항해서 살아날 궁리를 하게 될 거야. 그런데 말이야. 이만한 영역도 굉장히 훈련받은 사람에게나 가능한 거라고. 보통 사람들은 급박하고 치명적인 상황에 놓이면 일단 몸이 굳어버려. 몸만 굳겠어? 그렇지 않아. 생각도 함께 멈춰버리지. 공포란 그런 거라고. 진지하리만치 정확한 죽음의 사인에 맞닥뜨리면 공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본능에 충실한 채 오들오들 떨거나 분비물로 바짓가랑이를 적시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하지만 넌 그 상황에서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할 거야. 공포란 그런 거라고.
자.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냐. 정작 몸 어딘가로 그 날카로운 촉감이 파고들고 나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훈련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성의 역할은 완전히 종결된 거나 다름없어. 고통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통은 느끼는 사람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 일단 그 고통이 신경계통을 통해 뇌로 입력되면 반응은 정해져 있어. 본능적으로 어떻게든 고통을 최소화할 방법을 찾지. 최선을 다해 몸을 비틀거나 괴력을 발휘해 상대방을 밀쳐내려고 발버둥을 치게 돼. 그리고 그동안 질러보지 못했던 최대한의 비명을 지르게 될 거야. 너도 알겠지만 고통은 가장 강한 신호 한 가지 만을 해석해. 그래서 예리한 무언가가 세포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이 있는 한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목이 아프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거야.
뜨거운 냄비를 맨손으로 잡았을 때를 상상해봐.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반응이 나뉘어. 뜨거움을 참아내는 사람과 참지 못하는 사람. 하지만 참을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열기는 절대 손으로 잡고 버틸 수 없어. 손에 닿는 순간 이미 냄비를 놓아버리고 말아. 그 안에 무엇이 들었건 말이야. 이 프로세스에서 ‘생각’ 혹은 ‘이성’이라는 게 작용할 여지가 있을까? 이건 자신의 의지나 생각과는 전혀 무관한 반응이라고. 그만큼 생존본능은 강력하고 누구도 거스를 수 없어. 사람들이 고통에 대해 자신하는 건 고통에 무지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너무나 안전한 사회를 살아가는 탓에 진지한 고통은 거의 겪어볼 기회가 없어. 그 결과 자신이 대단히 지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존재라고 판단하지. 하지만 고통 앞에 서면 모두가 같아. 스스로도 놀랄 만큼 가장 솔직하고 직설적인 반응이 나와. 그 민낯이 가장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지만 모두가 늘 부정하고 사는 것이기도 해.
서두는 이만하면 됐고, 그럼 넌 어떨 것 같아? 여전히 그런 눈으로 날 보는구나. 눈동자에는 혐오와 증오가 가득해. 네가 날 인간 이하로 취급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 언제나 나를 바라보는 네 눈빛에는 혐오가 머물러 있었지. 하지만 오늘의 눈동자는 조금 새롭네? 괜찮아.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눈동자는 수많은 말을 대신 내뱉으니까. 증오에 대해 알려줄게. 증오는 혐오와는 조금 달라. 너는 날 미워하고 있는 줄 알겠지만 아직까지는 그저 징그러워할 뿐이야. 증오의 역할은 따로 있어. 마음 깊은 곳에 응집 중인 공포를 분산시키기 위함이지. 이제 알겠어? 증오는 날 미워하기 위한 게 아냐. 날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지. 아직도 자존심 따윌 지킬 여력이 있는 네게 존경을 느껴. 그 당돌한 눈빛을 조금 더 마주하고 싶지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게 아쉬울 뿐인걸.
원하는 게 뭐냐고? 왜? 이제야 뭔가 협상이라는 걸 해보고 싶은 거야? 똑똑한 줄 알았더니 기대에 영 못 미치는걸? 나는 물론 네 눈동자를 사랑하지만 너의 그 한심한 속사정까지 사랑할 순 없을 것 같네. 협상이라는 건 여지가 있을 때나 성립되는 거야. 지금의 네 처지가 나와 협상할만한 위치라고 생각해? 알랑한 자존심 따위를 아직 고려대상에 넣어 둔 건 그런 판단 때문이겠지만 안타깝게도 너는 내가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않아. 난 이미 원하는 걸 모두 얻었거든.
그동안 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몰랐어. 그래서 그토록 사랑을 갈구했었는지도. 이젠 알아. 사랑은 내게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는 걸. 이렇게 널 붙잡아두고 보니 확실히 알겠어. 나는 사랑을 원했던 게 아냐. 널 원했을 뿐. 널 갖는데 사랑이 필수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 위해 꽤나 먼 길을 돌아왔지 뭐야. 넌 선택해야 할 거야. 나를 억지로라도 사랑할지, 아니면 이 어두컴컴하고 음습한 장면을 네 세상의 마지막 장면으로 남길지를. 사랑은 그런 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넌 여전히 날 우습게 보는구나. 그래. 딱 그 정도였지. 언제나 그랬어. 손대기 싫어 내버려 두는 초파리 정도로 날 보았지.
넌 지금껏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하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한 가지만 더 알려줄게. 사실 우린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어. 선택은 여러 개의 답안 중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하나를 고를 수 있을 때 의미를 가져.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늘 막다른 골목이었어. 너는 달랐을 것 같아? 세상은 늑대 무리가 사슴을 사냥하듯 인간을 조련해왔어. 늘 무언가에 쫓기고 있지. 네 갈래 길 중 세 갈래 길이 막다른 길이거나 낭떠러지야. 혹은 굉장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 너는 선택을 해야 해. 하지만 모두가 같은 선택을 하지. 그걸 과연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사랑?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단어야 그건. 사랑은 우리를 막다른 선택으로 모는 수많은 힘 중 하나일 뿐이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을 약점을 갖게 돼.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너에 대한 사랑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어. 너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지. 하지만 지금 네 모습을 봐. 담담함을 가장한 채 내게 속내를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잖아? 가련한 눈동자란. 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내게 무릎 꿇고 싶겠지만 아직 버리지 못한 가면이 그 손을 붙들고 있을 거야. 하지만 결국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될걸? 이건 마지막이 정해진 시나리오야. 네 역할은 고작해야 으름장을 놓다가 통하지 않을 것 같으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는 것뿐.
슬슬 배고플 시간이야. 너 같은 사람들은 모르는 고통 중 하나지. 허기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곧 알게 될 거야. 아직은 네 고운 눈빛에 독기가 흐르지만 반나절 후에도 같은 눈빛 일지 어디 두고 보자고. 나는 하루 세 끼 꼬박꼬박, 거기다 간식까지 챙겨 먹지 않으면 눈이 돌아가는 식욕에 충실한 존재라 배를 채우고 와야 해. 안 그러면 네게 험한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 말해. 난 언제든 너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