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볼 수 없는 것이 ‘자기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자신을 아는 것은 건강한삶의 토대가 된다. 실패는 나를 살피는 법을 알려주었고, 인간이 불완전하고 흔들리기 쉬운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실패
실패해본 적이 없었다. 신중한 성격이었던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고 성공이 확실한 시도만 했다. 학생 시절 발표를 아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확실히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스스로 나서지 않았다. ‘만에 하나’를 싫어했다. 무지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인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시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찾아와 질문하는 친구에게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그것은 인정 욕구를 충족시키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때 선생님을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일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무표정, 그래서 별명이 ‘포커페이스’였다. 먼저 말을 거는 친구와 대화를 피하지 않았지만 먼저 말을 거는 일은 드물었다. ‘호수 위의 섬’과 같은 삶을 살았다. 타인을 건드는 것도, 누가 나를 건드는 것도 싫었다. 내기도 피했다. 돈을 따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것은 더욱 기분이 상했다.
그랬던 내가 결과를 고민하지 않고 주사위를 던진 것이 바로 사관학교 입시였다. 장교가 무엇인지, 사관학교가 어떤 곳인지도 잘 몰랐던 나는, 수능 모의고사나 다름없다는 친구들의 말에, 시험장이 별로 멀지 않다는 말에, 친구들을 따라 시험을 치르러 갔다. 우연찮게 1차 시험 합격자 명단에 올랐다. 일종의 보험이라 생각하고 2차 면접과 체력테스트도 통과해 두었다.
최초로 한일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 그 해 수능은 난이도 조절에 실패했다. 1년 선배들 중에서 무더기로 수능 만점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던 동급생들은 그동안 응시해왔던 자신의 모의고사 점수에서 50점에서 100점 가까이 떨어진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보아야만 했다. 중간계층의 급락 속에서 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참담한 성적으로 어떤 대학교에 원서를 넣어야 할지 막막했던 찰나에 가뭄에 단비 같은 사관학교 합격 소식이 들려왔다. 재고의 여지가 없었다. 가정사가 겹쳐 독립에 대한 욕구가 컸던 나는, 계산기를 충분히 돌려보지 못한 채 사관학교 입교를 결정했다.
버티고, 버티고 또 버텼다.
나는 내가 매우 부족한 부분이 많고 불성실하며 일관되지 못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시키지 않아도 자기 평가를 하는 편이었고, 누군가 나를 평가하기 이전에 습관처럼 나에 대한 ‘채점 놀이’를 했다. 완벽주의적 성격을 가졌던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한 점수를 박하게 줬다. 그래서 항상 자신감이 부족했다. 철저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대부분 실패로 이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사관학교에서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예정된 실패는 오랜 시간 후에 나타났지만, 당시에는 그저 버텨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실패하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사관학교에서는 정식으로 입교하기 전에 5주간의 ‘가입교’ 기간을 거친다. 여기서 중도 탈락하면 사관생도가 되지 못한다. 그 이후에 이어질 생활은 더욱 가혹했지만, 그것을 몰랐던 당시의 5주는 말 그대로 지옥 같은 기간이었다. 매일같이 뛰어다니고 쪼그려 뛰기를 하고 가혹한 훈련을 받자, 당장에 고질적이었던 무릎 부상이 도지기 시작했다. 사관학교에는 매우 특이한 제도가 있는데, 환자로 분류된 사람은 복장 자체에 차이를 두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는 것이었다. 제복에 '어울리지 않는' 운동화. 그것은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내 모습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나는 사관학교의 시작부터 6개월간 운동화를 신고 생활했다. 이장 제도의 취지는 환자를 시각적으로 구분해주어 무작정 훈련을 시키지 않기 위함이었으나, 나에게 그것은 일종의 ‘낙인’이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만두고 돌아오라고 하셨지만, 나는 꿋꿋하게 버텼다. 그랬다가는 정말로 실패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게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나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결국 나는 다리로 받지 못하는 훈련을 상체운동으로 대체하며 반년을 버텼고, 쉬지 않고 팔 굽혀 펴기 150개를 정자세로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나를 독하다 하는 이도 있었으나 당시의 나로서는 절박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버티고 받은 3주의 하계휴가 기간 동안 무릎 수술을 받았고 아직 완전히 아물지 않은 채 목발을 짚고 복귀하는 나를 바라보며 어머니는 눈물을 숨기지 못하셨다. 그 후로도 약 한 달간의 재활을 거친 뒤에야 모든 훈련에 온전하게 참가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겪어본 완벽한 '실패'
12살 터울 동생이 있지만, 나는 사실 외동으로 자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처음 해보는 기숙사 생활이나 누군가와 한방을 같이 쓴다는 것, 쉴 새 없이 24시간을 타인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는 것들이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물 공포증이 있던 나에게 2주간 물속에서 지내는 전투수영 기간을 버티는 것이나, 멀미가 심해 버스도 타지 않고 걸어 다녔던 나에게 몇 달씩 배를 타고 다니며 선상에서 수업과 시험이 이루어지는 생활 역시 지옥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버티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을 사관학교에서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4년을 버틴 끝에 장교로 임관했고, 그것은 나에게 대단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선물해 주었다. ‘역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오만함을 심어주었다. 그래서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했던 나의 결정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 길이 나와 잘 맞는 길이라며 자기 최면에 빠질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최면에서 빠져나오는데만 13년이 걸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실패'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들은 뜻한 대로 이루어졌다. 내가 시험성적을 올리고 싶으면 갑작스럽게 벼락치기를 하면 올라갔고, 오래 달리기를 잘하고 싶으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기록은 향상되었다. 피아노를 배우고 얼마 되지 않아 대회에서 은상도 탔고 태권도 학원을 다니면서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단증을 취득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경쟁했고 그들과의 경쟁에서도 크게 힘들이지 않고 내 몫을 가져갈 수 있었다. 내가 버티려고 하면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착각으로 오만했고 하고자 하면 이뤄졌기에 나는 금방 질리곤 했다. 끈질기게 오래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 내게 가장 잘 맞는 것은 그저 적당한 직장에 들어가서 나오는 월급 받으며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실제로 나는 그렇게 ‘잘’ 살았다.
학업, 결혼, 출산, 육아, 취업... 이 모든 것에 나는 특별히 힘든 것이 없었다. 사회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기별 과업, 이런 것들을 나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착착 이뤄갔다. 큰돈을 벌거나 사업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고 부모님은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나를 뿌듯하게 생각하셨다. 그처럼 쉽게,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던 것들이 이제 와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일까. 아무렇지 않게 살아오던 나는 ‘아무렇지 않게’ 우울증에 걸려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겪어본 아픔이자 완벽한 ‘실패’였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무너지다.
실패를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실패가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내가 딱 그랬다. 나는 단 한 번의 실패로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실패를 너무나 두려워했기에 실패를 끊임없이 피해 다녔던 나는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랐고 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상황에 절망했다.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후들거리는 다리는 마음을 지탱해주지 못했다. 삶은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고, 나는 모든 것들에 대해 흥미를 잃어갔다. 무감각한 인형처럼 앉아있는 내게 사람들은 무슨 일 있냐고 물었지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아니...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어야만 했다. 원인모를 불안은 의심에 먹이를 주었다.
흔히들 체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의지력에는 한계가 없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의지력 또한 유한한 인간의 특징을 그대로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능력 중 무한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체력이 떨어진 사람에게 계속 뛰라고는 하지 않는 반면에, 마음에 병을 얻어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의지로 참고 버티라는 말은 참 쉽게 한다. 그 말이 주는 처절한 무게감을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다.
폐렴에 걸린 사람에게 의지로 버티라고 하지 않는다. 병원에도 가고, 입원 치료도 받고, 약도 잘 챙겨 먹고, 푹 쉬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울한 사람에게는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하냐고 말한다. 남들도 다 너처럼 힘든데 버티고 산다고 말한다. 아픈 사람이 아프다고 말할 수 없도록 입을 막아버린다. 그리고 ‘의지’가 약하다 비난한다. 얼마나 참고 버티는지 모른 채 그들은 독화살을 날려댄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성벽은 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화살비를 고스란히 맞고 만다. 나는 나의 아픔에도 무감각했다. 타인의 비판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내면화했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문제였다. 최후의 아군이 되어주어야 했던 나마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실패한 나를 인정하지 못했다. 우울증에 걸린 나를 ‘의지’가 약하다며 자책했다. 그동안 잘 버텨온 '과거'를 그리워하며, 현재의 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꾸만 무너지고, 불안해하고, 그래서 수시로 고개를 숙이는 나를 보며, 더욱 실망하고 원망했다. 그렇게 우울증은 3년 반 동안 심해져만 갔고, 나는 마음대로 약을 끊고, 병원에 나가지 않았고, 마치 치유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인 학대를 계속했다. 치료는 매번 실패했고, 그렇게 나의 인생도 ‘실패’로 끝나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을 지우고 ‘리셋’하는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바래선 안 되는 것을 꿈꾸고 있었고, 이것은 현실감각마저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
참으로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나에게 ‘가족’이란 단어가 없었다면 그즈음 나는 세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책임감. 그것이 내 세상의 끝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수없이 가족을 원망했고, 나의 선택을 원망했지만 그럼에도 가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끊임없는 딜레마에 빠져 어떠한 결정도, 선택도 내리지 못한 채 흐느껴야 했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된 선택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 선택의 결과 중에는 가족, 아내,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을 증오와 원망으로 삼는 나에 대한 더 큰 자책이 이어졌다. 원망과 우울의 메커니즘에서 벗어날 방법을 몰랐다. 모든 것이 막막했고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짐덩이처럼 여겨졌다. 사랑했고, 행복했고, 즐거웠던 기억들은 사라지고 뿌리 깊은 원망들만 남아있었다.
‘나는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했을까. 나는 그때 왜 사관학교 입교를 결심했을까. 그때 왜 나는 재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왜 그렇게 빨리 결혼했을까. 책임질 능력도 없는 내가 아이들은 왜 3명이나 나았을까. 나는 왜 그렇게 무책임했을까.’
수많은 생각들과 질문인지 자조 섞인 뇌 까림인지 모를 의문형 문장들이 수시로 메아리쳤다. 한 때는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내 처지를 저주했다. 죽지 못하는 이유는 우습게도 생명보험금이라도 남기지 못하고 떠날 수는 없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살로 여겨지지 않을 방법을 찾아보기도 했다. 도로에서 거칠게 운전하며 누군가와 정면 추돌하기를 바랐던 적도 많았다. 하지만 초월적인 어떤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나를 너무나 잘 피해 갔고, 결국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그렇기에, 인간은 불완전하고 필연적으로 실패에 직면한다.
인간은 참으로 불완전하고, 우리의 기억은 왜곡되고 편향되기 쉽다. 그렇게 한 번 실패하기 시작한 나의 인생에는 계속해서 실패들만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직업에서의 실패, 가정에서의 실패, 치료의 실패. 실패한 내가 부끄러웠고, 그래서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알고 지내왔던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갔다. 나는 고립되어갔고 외로워졌지만, 한편으로는 누구도 찾지 않는 그 순간이 차라리 편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지고 있었다.
거부할수록 그것에 골몰하게 되는 모순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우울증을 밀어내려고 할수록 점점 더 우울한 감정에 집착하는 나를 느꼈다. 끈질긴 우울증은 더욱더 나를 친친 동여매어왔다. 점점 더 깊은 의심에 빠져갔다. 현재의 문제를 영원으로 가져가며, 이 상황을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원히 이 지긋지긋한 우울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을 거야. 내 인생은 끝났어. 역시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던 거야.’
한 번 우울증에 발을 담그자 어쩌다 갑자기 기분이라도 처지는 날이면 불안이 불쑥 치솟아올랐다. 또 우울증이 오는 것은 아닐까?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 불안에 불안이 더해졌고 명치끝에 돌덩이가 올려져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우울증은 신체증상으로도 나타났고, 병원에서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했다. 나는 꾀병을 부리는 것인가?! 스스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치솟았다. 통제할 수도 없고, 원인을 알 수도 없는 문제들에 절망감은 더해져만 갔다.
제대로 된 '실패'를 겪은 후에야 얻을 수 있는 '값진' 행복들
우연히, 커다란 노력을 들이지 않고 찾아왔던 행운은 결코 내게 ‘행복’을 선사해주지는 못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어쩌면 우울증 덕분이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나는 글을 쓰면서 우울증을 극복했다. 남들이 원하는 ‘안정적인’ 직장은 그만둘 수밖에 없었지만 거기에 대한 아무런 후회도 없었다. 매달 나오는 안정적인 급여를 위해 포기하고 인내해야만 했던 지난날들이 아쉽게 여겨질 뿐이다. 내가 조금 더 빨리 나 자신과 마음에 대한 대처법들을 알았다면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았을 텐데.
휴직했던 수개월 동안 내 안에 담겨있던 수많은 울분과 답답함을 미친 듯이 써내고 나자, 묵은 갈증이 내려갔고, 숨을 쉴 수 있었다. 꽉 막혀있던 숨구멍에 틈이 생겼고, 그 공간을 통해 바깥세상의 신선한 공기들이 내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금씩 다시 세상을 보는 눈이 균형을 찾아갔고, 내 마음을 이해해가는 과정에서 우울증은 자취를 감췄다.
물론 지금도 가끔 우울해지곤 한다. 여전히 나는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도 완벽주의에 시름한다. 그 스트레스는 내가 좋아하고 원해 마지않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결코 무언가를 쉽게 쉽게 해내는 성격이 아니다. 이런 성향은 '글쓰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미 굳어진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 하는 것만큼 소모적인 것은 없다. 다만 나를 대하는 시선과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비 오는 날은 아침부터 처지기도 하고, 어떤 날은 굉장히 피곤해 머리를 들지 못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그저 당연한 나의 일부로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당연히 우울해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에, 다음날이면 괜찮아질 것을 안다. 가끔 불안해지기도 하지만 그 불안이 자연스러운 것임을 안다. 불안의 순기능을 알면 오히려 불안이 없는 삶이 더욱 위험하고 공포스러움을 깨닫게 된다. 많은 문제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때때로 감정이 치솟거나 가라앉지 않는 폭풍을 만날 때면, 단 10분이라도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가진다.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조용히 종이에 적어본다. 차분하게 그것들을 정리해내고 나면 나는 다시 괜찮아진다. 그리고 하루의 감사한 일들을 떠올려본다. 세상의 감사한 마음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내 안에 에너지를 채운다. 조용하고도 즐겁게 행복을 만끽한다. 이런 행복은 결코 내가 제대로 된 '실패'를 겪기 전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것들이었다.
우울증은 마음이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지금도 가끔씩 생각해본다. 당시의 나는 무엇이 그리도 심각했던 것일까. 안절부절못하고 살았던 것일까. 그래서 인간에 대해 계속해서 공부해보게 된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 사고방식, 이성, 본능, 심리, 마음, 편향, 비합리적 신념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보게 된다. 마음의 작동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관심'이 나를 이끄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사라졌던 세상에 대한 흥미와 지적 호기심은 다시금 샘솟고 있고, 알면 알수록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 우울증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곳에서 버티는 행위를 멈추라는 일종의 '신호'였다. 제발 너에게 찾아온 '번-아웃'을 눈치채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 모른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독서에 심취했던 나는 군인의 삶을 살아온 17여 년 동안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멀어졌었다. 취미와 같은 '사치'스러운 활동에 나눠줄 에너지 따위는 없었다.
그곳에서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녹초가 되어 돌아왔고, 고된 업무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날도 많았다. 항해를 나가면 매일같이 자정에 눈을 떠 밤샘을 할 때도 많았고, 때로는 정해진 룰에 따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갇혀 있어야 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는 시간을 '죽이기' 위해 게임 같은 빠져 있었다. 하루가 1년 같았고, 매년 근무지는 옮겨 다녔으며, 맞지 않는 사람에게 생각과 사상을 맞추기 위해 있는 힘을 모두 짜내야 했다. 무엇보다도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고, 의미를 느끼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이것들이 마음에 독을 채우는 무자비한 행위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마음속으로는 끊임없이 비판의식과 의문을 느끼면서도 그것들을 누르기만 했다. 그 안에서 답을 찾으려는 노력은 오히려 나를 더욱 절망에 빠트렸다. 그렇기에 스스로 사고하지 못하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고독했고, 답답했다. 지적 갈증을 느끼는 법을 잃어버렸기에 호기심을 채울 생각도 못했다. 삶의 재미를 느낄만한 일들은 사치가 되었고, 그저 지금의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만을 바라는 끔찍한 사고방식이 습관처럼 자리 잡혀 있었다.
완벽주의의 '단맛'이 채워줄 수 없는 '공허함'
내게 군인은 너무나 맞지 않는 길이었다는 것을 군인을 그만두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토록 맞지 않는 직업군인으로 살아온 17여 년의 기간 동안 나는 얼마나 열심히 버텨왔던 걸까. 심지어 나는 그 비틀림 속에서도 나름 잘 생활해왔다. 부대원들은 나를 좋아했고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빈틈없이 처리해왔다.그것이 내가 가진 완벽주의의 ‘단맛’이었다. 이러한 단맛에 빠지면 쉽사리 완벽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한다. 어쩌면 그토록 완벽한 모습으로 포장하려 애를 썼던 건 뿌리 깊은 ‘인정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솔직한 내 모습만으로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을 거라 단정 지었기에.
몸이 그렇듯, 정신 또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체력과 마찬가지로 의지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마음은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온다. ‘우리 좀 쉬어가자.’며 말을 걸어온다. 하지만 눈과 귀를 막아버린 사람에게는 이런 신호가 느껴지지 않는다. 쓰지 않는 기능은 ‘퇴화’되는 것처럼, 보고 듣지 않는 기간이 길어지면 내면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감지하는 능력이 퇴화된다.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고, 비어 있는 공간에 '가면'들만이 가득해진다. 내가 원래 누구였는지 모른 채, 연기만을 반복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 공허함은 가면들이 채워줄 수 없음에도, 우리는 자꾸만 바깥으로부터 무언가를 채우려 든다. 때때로 완벽하지 않은 나를 완벽하게 포장하는 일은 성공을 위해 필요하지만, 가면을 쓰는 행위가 자신에게 부담이 되고 스트레스를 함께 준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알지 못하는 것은 대비할 수 없으며, ‘무지’라는 폭력은 스스로를 사지로 내몰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우리가 가장 보기 힘든 것이 ‘자기 자신’이다. 소크라테스의 오래된 명언 ‘너 자신을 알라’는 실로 중요한 지혜를 담고 있다. 우리가 매일 보고 사는 건 타인이다. '거울'을 따로 챙겨보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마음의 거울'을 갖추어야 한다.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은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데 굉장한 무기가 된다.
나는 실패를 통해 ‘나를 보는 법’을 알게 되었고, 긴 시간의 그늘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불완전하고 흔들리기 쉬운 존재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나를 보는 관점과, 타인을 보는 관점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 수 있었고, 완벽이 미덕이 아님을 깨달았으며, 목과 어깨에 쓸데없는 힘을 빼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인고의 시간 끝에 성숙한 인간이 됨을 알 수 있었다.
실패는 자신을 돌아보게 해 준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결코 어렵지 않다. 자신과의 조용한 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만 인지하면 된다. 그런데 그 필요성을 느낄만한 계기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실패는 나에게 그러한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아주 절실한 계기를. 그래서 나에게 실패는 곧 ‘기회’였다. 실패했기에 나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었고, 긴 방황 끝에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실패를 몰랐던 내가 실패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소득은 실패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행복하다. 인간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 대해 생각하고, 글을 쓰고 생각하는 지금이 행복하다. 이런 것이 그토록 원해왔던 ‘행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