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오랜 친구, '우울'에 대하여

오랜만에 들춰본 옛 기억이 생각보다 우울하지 않은 것은

by 작가 전우형

까만 화면 속에 나를 바라보는 내가 비치고 투닥투닥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밤을 채운다. 어둠은 과거를 회상하기에 안성맞춤이어서 가끔 눈물이 맺힌다. 마음은 고약하게도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가장 다루기 힘들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2015년은 우울증 진단을 받던 해다. 당시 근무지는 해군 잠수함사령부 95 잠수함전대였고 나는 임관 8년 차 대위로 전대 작전관 보직 중이었다. 전대장 아래 선임 참모 그리고 작전관(나), 주임원사, 갑판장, 행정장으로 구성된 소규모 부서였으나 손원일급 잠수함 3척을 지휘하고 전비태세를 유지하는 가볍지 않은 임무를 담당했고, 당시 손원일급 잠수함은 손원일함, 정지함, 안중근함 이렇게 3척이 실전배치 운용 중이었다. 현재는 손원일급 잠수함보다 배수톤수가 1200톤 더 나가며 수직발사관도 탑재한 3000톤급 디젤 잠수함(1번 함 도산 안창호 함)이 전력화 진행 중이지만 2015년 당시만 해도 손원일급 잠수함은 아 해군 최신 잠수함이었고 실전 운용 중인 것은 3번 함 안중근함까지였다. 4번 함 이상은 건조 중이거나 인수 전력화 단계를 진행 중이어서 실질적으로 가용한 손원일급 잠수함은 모두 95 전대 예하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최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전력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가볍지 않다. 신규 장비나 무장이 탑재되는 만큼 장비 운용 노하우는 부족하고, 실전 성능을 테스트할 부분도 많다. 작전개념, 전술 정립, 교리 교범 재개정 소요가 많아 전술토의가 빈번하고 최신 잠수함인 만큼 무력 현시를 위한 행사 차출 빈도도 높다(이 외에도 루틴 한 업무 목록만 A4용지 3페이지가 될 정도로 많았지만 업무 기술서 등의 세부내용은 보안이 필요할 것이기에 생략한다). 하지만 장교는 전대장, 선임 참모, 작전관 이렇게 셋 뿐이어서(원래는 두 명의 위관장교가 더 보직되어야 했으나 함정요원 우선 충원에 따라 전대와 같은 육상부서는 늘 인력난에 시달렸다) 작전관이었던 나는 전대에서 일어나는 대소사에 모두 관여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업무는 선임 참모를 1차적으로 거쳐야 했고 보고계통, 업무 수준, 결재권자, 위임전결 예규 등에 따라 전대장, 참모장, 부사령관, 잠수함 사령관까지 보고가 이어지기도 했다.


부임 후 새벽 1시에 퇴근하여 아침 6시 출근하는 주 7일 120시간 근무를 강행하던 나는 대략 3개월이 흐른 2015년 4월 경 출근 중 정신을 잃었다가 계단에서 쓰러진 상태로 눈을 뜬다. 쓰러진 경과가 기억에 없고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 뒤늦게 출근하지만 극심한 두통과 흉통, 호흡곤란 등으로 의무대를 방문하고, 군의관 상담 하에 가까운 준종합병원에 내원하여 진료를 받지만 특별한 신체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통제를 처방받고 돌아온다. 쓰러진 당일에도 많은 업무가 산재해 있었고 진료를 받던 와중에도 계속해서 전화를 받던 나는 그날 이후 좀처럼 사무실 내에 머물지 못했으며 불안증세가 심해 옥상을 맴돌다가 선임 참모의 호출을 받고 사무실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던 나는 순간적으로 팔다리가 마비되어 교통사고를 당하고 선임 참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으며 지인의 조언에 따라 부대 병영생활 전문상담관을 찾아가 상담을 의뢰하게 된다.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 나는 1시간이 넘는 시간 상담시간 동안 태어난 이후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으며 몇 가지 자기 보고식 검사를 마친 상담관은 결과를 차분히 설명하며 내게 정신건강의학과(이하 정신과) 진료를 권한다. 그렇게 내원한 정신과 전문의와의 첫 진료에서 나는 '중등도 우울장애' 진단을 받게 된다. 그날 이후 5년간 지속되며 결국 해군 장교 생활 청산을 도운, 이제는 너무 익숙해 마치 친한 친구처럼 여겨지는 우울증의 시작이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진단서와 의사 소견서를 지참하고 부대로 복귀한 나는 특별한 말 없이 두 서류를 선임 참모에게 제출했고 선임 참모는 그 길로 전대장에게 내 상황을 보고했다. 전대장은 별다른 질책 없이 내게 우선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오며 심신을 회복하라고 지시했고, 그 후 여러 가지 상황이 오갔지만 결국 내가 다시 작전관으로 복귀한 것은 그로부터 대략 1달의 시간이 흐른 2015년 5월 말이었다. 지속적인 상담과 항우울제 복용을 통해 우울장애 증상은 일부 호전되었고, 복귀에 앞서 헤아릴 수 없는 공포가 뒤따랐지만 이대로 그간 노력해 온 직업을 포기할 순 없었고 나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선임 참모 역시 내가 우울장애 진단을 받은 후 많은 태도 변화가 뒤따랐기에 아주 약간의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 해 나는 지휘검열 수검 우수 유공으로 잠수함 사령관 표창을 받고, 잠수함 3척을 이끌고 국제관함식 해상사열에 참가하였으며, 전대는 작전사령부 최우수 전대로 부대표창을 수여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춘천마라톤에 참가하여 42.195km 풀코스를 완주(물론 기록은 형편없었다) 하기도 했다. 여전히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었지만 '어쩌면'이라는 희망을 가진 해였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다음 해 들어 산산조각 난다. 해가 바뀌며 전대장과 선임 참모가 교체되었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적응의 문제였을까. 2016년 4월 말, 나는 또다시 정신을 잃은 채 부서원에게 발견되었고 내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생전 처음 타 본 앰뷸런스의 좁고도 복잡한 실내였다. 1년 동안 같은 근무지에서 두 차례의 실신을 경험한 나는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공포와 불안에 빠지고 만다. 당시의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고 본부 장교 인사과에 문의해 전역절차를 묻지만 아직 임관 후 10년의 의무복무기간(사관생도는 4년간 전액 장학금을 받기 때문에 의무복무기간은 10년이다. 5년 차에 일부 인원에 한해 의원전역이 가능하다.)이 종료되지 않아 전역은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는다. 그렇다면 잠수함 부대라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우선 잠수함 승조자격 해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고민에 빠진다.


생각보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던 것 같다. 임관 첫 해를 제외한 나머지 8년의 기간 동안 청운의 꿈을 키워 온 잠수함 승조원 자격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나는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고 점차 허물어져가는 정신은 무언가를 '추구'할 여력이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남들은 그토록 원하는 평생직장이라도 집어던지고 싶은데 그깟 잠수함 승조자격이 대수일까. 그렇게 나는 정작 잠수함에 대한 지식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는 상태로 원에 의해 잠수함 승조자격을 박탈당하고 정든 잠수함 부대를 떠나 교육사령부로 보직을 옮기게 된다.


교육사령부에서 근무하며 나는 입대 후 처음으로 퇴근시간의 개념을 깨닫는다. 하계절 오후 5시, 동계절 오후 5시 반. 입대 후 처음으로 퇴근길 교통체증을 느껴본 나는(그 전에는 텅 빈 도로를 홀로 달릴 때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해를 본 날이 거의 없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교육부대라고 해서 모두가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건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일선 작전부대에 비해서는 여유가 있는 편이고, 나의 경우 일신상의 문제로 인한 전출이었기에 교육사령부에서도 비교적 업무가 경한 부서로 전출이 진행되었다. 또한 새로이 보직된 부서의 부서장은 매우 합리적이고 불필요한 행정을 최소화하는 사람이었고 그때 같아서는 이런 사람만 있으면 군생활을 좀 더 해볼 수 있겠다고 희망을 얻을 정도였다.


하지만 가까스로 회복되려다 재차 무너진 정신세계는 나의 기준에서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근무환경조차 종종 버텨내지 못했고, 무엇보다도 약물에 의존해야 하는 나의 상태를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임의로 약물치료를 중단했다가 증상이 악화되기를 반복했다. 근근이 버틴 1년 6개월의 시간 동안 큰 부담이 없는 부대 업무는 별다른 문제없이 마쳤지만 약물치료 중단의 여파로 큰 가정불화가 찾아왔으며 어떻게든 숨겨왔던 부모님에게까지 내 우울증 소식이 전해지며 절망은 더욱 깊어만 갔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매 순간 들었지만 가장 마지막 순간 나를 붙들어준 것은 결국 아내와 가족이었다.


큰 환경의 변화는 위험했지만 마냥 미룰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2018년으로 넘어가면서 나는 또 한 차례 근무지를 옮기고 우울증은 재차 악화되었다. 약물로도 어쩔 수 없는 절망과 무력이 이어졌고 그 해 4월 경 나는 마지막으로 휴직을 선택한다. 명목은 육아휴직이었지만 사실상 조금이라도 회복시간을 벌어보려는 심산이었다. 이제는 의무복무기간도 종료되어 언제든 전역할 수 있었지만 세 아이를 키우는 부모 입장에서 삼십 대 중반에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너무나 두려운 일이었다. 아내도 '어쩌면'이라는 기대 속에 조금 더 버텨보길 원하는 눈치였고 나 역시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이었다.


휴직기간 동안 내가 한 것은 '글쓰기'였다. 미친 듯이 글을 쓰는 동안 이해할 수 없던 나의 모든 문제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고 한 권 분량의 책을 쓰고 출판 계약을 완료하던 날 마법처럼 나의 우울증은 사라졌다. 그때가 2018년 7월이었고, 그렇게 발간된 책이 [당신이 힘든 이유는 감정 때문이다]라는 나의 첫 저서였다. 당시에는 내 모든 것을 뿜어내듯 쓴 책이었지만 지금은 읽어볼수록 어쩐지 얼굴색이 붉어지는 것 같아 홍보도 거의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책의 완성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주었음은 분명하다.


나의 영원한 친구 우울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2015년 4월에(어쩌면 그 이전부터 이미) 나를 찾아와 2018년 7월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동안의 노력은 물론 가정과 삶을 송두리째 무너트렸던 '우울'이란 놈은 이제 약물에 의지하지 않고도 감정의 변주를 일정 범위 안에 가둘 수 있을 만큼 친근하고 부드러워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존재하던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심리학에 관심을 가지며 '세상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은 문제는 그저 남은 삶과 같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2019년 복직 후 1년간 서해바다를 넘나드는 동안 나의 심신은 다시 조금씩 지쳐갔다. 큰 문제는 없었지만 다시금 조금씩 내 안의 무언가가 모래처럼 바스러지고 소멸되는 것이 느껴졌으며, 금이 간 유리는 언제 깨어질지 몰랐다. 1년 간의 함정근무를 마치고 2020년 다시금 나는 함대 작전과 보직을 받는데 그 부서는 2함대 군함 수십여 척의 작전을 담당하는 곳으로 '저녁 먹고 다시 들어와서 일하는' 재미난 문화가 당연시되던 곳이었을 뿐 아니라, 상황이 발생하면 퇴근 후나 야심한 시각이라도 1시간 내에 뛰어들어와야 하는 곳이었다. 주말은 물론이고 나흘간의 설 연휴기간 내내 출근해서 하릴없이 상급자 눈치만 보는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군생활의 꿈을 접었다. 그런 생활이 조금 더 지속된다면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게 뻔했고, 이번에는 정말 회복될 수 없을지 몰랐다.


전직지원기간을 거쳐 2020년 12월 31일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파로 전역신고도 생략된 채 우편으로 전역증이 배달되었다. 아쉬움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2020년 5월 시작한 브런치 작가 생활은 이제 1년 반에 다다르고 있다. 앞으로 나의 삶에 무엇이 더 찾아올지 짐작할 수 없지만 내게 제2의 인생을 선물한 '글쓰기' 하나만큼은 놓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우연히 존경하는 분과의 대화에서 시작된 길고도 짧은 회상(돌아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다.)은 이곳에서 일단락 지으려 한다. 모두 평온한 밤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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