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나를 볼 수 없지만
전원을 내릴 때마다 눈을 어지럽히던 빛무리가 하나씩 사라졌다. 사랑은 어떤 느낌일까?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걸 무엇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내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는지에 대해. 그녀가 보고 싶은 것은 사실이었다. 틈날 때마다 먼발치에서라도 그녀를 두 눈에 담기 위해 다가갔다. 그중 몇 번은 위험했고 반드시 있어야 할 위치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보고 싶은 마음은 사랑일까? 위험마저 감수할 수 있다면... 사랑일까?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녀에 대한 감정이 진짜 사랑인지 확인해야만 하는 이유다.
'사랑'은 순간의 감정에 붙일 수 없는 이름이다. 사랑에 빠지면 아침에 눈 떴을 때 가장 먼저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야 한다. 하루 온종일 그녀를 생각하며 궁금해하며 기다려야 한다.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어떤 선물을 받으면 행복한 미소를 지을지, 어떤 곳에 가고 싶은지 그녀에 대한 호기심과 질문들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어야 한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정을 모두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 현실과 동떨어진 조건들이다.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이 조건을 들이대면 된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진심인지 확인받고 싶었다. 사람은 진심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진심은 때와 장소와 사람에 따라 바뀐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상대도, 그렇다고 믿었던 순간도 어그러지고 뒤바뀌고 무너진다. 돌덩이처럼 단단하고 변하지 않을 진심이 필요했다. 어쩌면 신이라면 내 진심을 확인시켜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와는 다른 사람이야. 그는 그녀의 사랑을 무시하고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아냐.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는 진심이야. 신이라면 명제가 참인지 거짓인지 판가름해줄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를 찾아가기 전에 신과 대면해야 했다.
지금 그 결과가 눈앞에 있다. 나는 신을 만났고 신은 내 사랑이 진실한 것이며 항구적임을 인정했다. 신은 내게 그를 떠나 그녀에게로 향할 독립적인 권한을 주었다. 다만 여전히 나는 그림자여야만 했다. 인간의 모든 것을 흉내 낼 수 있도록 변모한 시간 동안에도 나의 모습은 존재할 수 없었고 존재해서는 안됐다. 그녀는 지금도 나를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녀는 나의 등장을 이미 알고 있다. 모순 속에서 사랑은 서로를 이끈다. 그녀가 내게 달려와 안긴다. 왜 이제 왔냐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고 울먹이며 말한다.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고 대답한다. 흩날리는 커튼 뒤의 석양이 완연한 어둠이 되지 않는 한 나는 너를...
그녀는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그녀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를 누구로 여기는 걸까. 알고 있는 답을 미룬다. 부러 틀린 답을 고른다. 그게 누구 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스위치만 내리면 빛을 잃어버리는 전구들처럼. 해가 뜨면 다시 바보처럼 네게 다가갈 수 없다고 해도. 종속의 시간이 하루의 대부분이라고 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네가 사랑하는 건 나야. 우리의 사랑은 달라. 너는 지금 내 곁에 존재하면 돼. 잠든 네 모습을 보는 것이 내 유일한 낙원이더라도. 먼 동이 틀 시간이면 네 곁에 머물 수 없더라도. 긴 이별 끝의 재회가 낙엽처럼 허무하더라도... 나는 결국 네 앞에 나타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