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14

두 남자의 잔상

by 작가 전우형

하얀 모래와 투명한 파도가 얽히고설킨다. 해안의 경계는 오묘하고 독특한 자신만의 영역을 이룬다. 그곳은 비무장지대처럼 타고난 주인이 없다. 정지된 공간에 누워 흐르는 하늘을 본다. 빠른 듯 느리고, 멈춘 듯 움직인다. 가지 않는 오늘 같고 오지 않는 내일 같다. 감각의 무게와 관계없이 시간은 흐르고, 좋았던 순간은 어느덧 과거다.


서서히 차오른 바다는 슬며시 발과 종아리, 허벅지, 엉덩이를 차례로 적시며 은근한 움직임으로 모래를 훔쳐간다. 모래 속으로 완전히 파묻히기 직전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해변을 따라 걷는다. 발자국은 파도에 휩쓸려 이내 자취를 감춘다. 돌아보니 누웠던 자리도, 걸어온 길도 사라지고 없다. 과거도 미래도 없이 어느 한 지점에 유령처럼 서 있는 이는 다름 아닌 나.


조개 모래를 한 움큼 집어 든다. 미세한 기억은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고 덩어리만 겨우 남았다. 놓친 기억을 다시 담으려 애써보지만 무심한 바닷바람을 타고 흩어져버린다. 그 망연한 상실의 잔여물마저 얇은 파도가 휩쓰는 모습이 나를 더욱 쓸쓸하게 한다. 허물어진 모래성 위로 다시금 몸을 뉘인다. 바닷물이 얼굴을 덮치고, 내뿜는 공기가 방울지며 떠오른다. 씁쓸한 심사를 대변하듯 짜고 텁텁한 모래가 입안을 맴돈다. 유실되는 기억의 해변에서 잃어버린 보물 하나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오늘도 허탕인 모양이다. 허탈한 걸음을 옮긴 발자국마저도 부는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또다시 원점.


휴대용 스크린을 펼치고 손바닥만 한 프로젝터를 작동시킨다. 기억이 순백의 스크린에 투사되고 회상은 시작된다. 조각조각 남아있던 타인의 흔적들이 모여 사람과 시간, 공간을 구성한다. 익숙함과 낯선 감정이 교차하는 페이지들 속에서 가장 먼저 나를 찾고, 후의 시선과 목소리를 떠올리며, 손 닿을 거리에 머물던 명이 이모를 본다. 후와의 기억은 삭막했던 나의 세상에 머물던 어둠을 밀어내는 힘이 있었다. 후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만으로도 공포는 슬며시 침대 밑으로 사라지곤 했다. 겁에 질린 고양이는 불러도 나오지 않는다.


모든 빛이 저물면 눈꺼풀 너머로 남아있던 희미한 빛무리마저도 사라진다. 그것이 싫어 아직 빛이 살아있을 때 먼저 눈을 감아버린다. 빛을 보지 못한다 하여 세상의 빛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으면 그저, 나의 세상에만 해가 저물 뿐. 모든 것은 그대로다. 의도적이면서도 어쩔 수 없는 세상과의 단절 속에서 삶의 본능적 몸부림은 어둠을 잠깐이라도 밀어둘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영혼의 발걸음을 이끈다.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에 후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특별한 순간에만 갈피를 꽂아두니까. 그 순간들은 힘주어 펼친 페이지처럼 자국이 남아 아무렇게나 던져두어도 유난스럽게 탁 하고 펼쳐져 있다. 덮어지지 않는 그 시간 속에 후는 여전히 남아있다.


눈을 뜬다. 불어온 바람이 앞머리를 한 올 한 올 흔들었다. 머리카락은 가볍지 않은 존재감을 뽐내며 이마와 속눈썹을 간지럽게 했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던 커튼의 움직임에 미묘한 위화감이 느껴지고 곧 하나의 존재감이 나타났다. 시각으로부터 소외된 그의 등장이 기다림의 끝을 알려주었다. 나는 칠흑 같은 어둠을 향해 달려갔다. 허공에 잔물결이 일었고 따뜻한 어둠이 나를 감쌌다.


"역시 왔구나."

"내가 누군 줄 알고?"

"또 장난이구나. 하지만 괜찮아. 이렇게 다시 와준 것만으로도."

"난 이미 도착해 있었어. 한참 전에."

"그럼 날 불렀어야지."

어둠 속에서 그림자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왜 웃기만 해?"

"아무것도 아냐. 그냥..."

"그냥 뭐?"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이 이마와 볼을 지나 귓불을 감쌌다. 흘러내린 머리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좋았다.

"예뻐서."

나는 그의 눈이 위치할 부분을 끝이 분명한 눈빛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런 사탕발린 말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내가 이쁜 거야 세상 사람들 다 아는 사실이고. 뭐가 웃긴...!"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그의 호흡이 나의 호흡을 덮었다. 유연하고 매끄러운 무언가가 평소와는 다른 용도를 뽐내며 기민한 움직임으로 입술을 파고들었다. 둘러싼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하나의 감각만이 남았다. 그 달콤함에 빠진 동안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입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이니까. 저항하고 싶지 않다. 그저 모든 것을 내맡기고 이대로...

그런데 중요한 감각 하나가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여기까지."

"뭐야. 누가 네 맘대로 시작하고 끝내래! 이리 안 와?!"

황급히 그를 잡으려 했지만 손에 걸리는 건 허공뿐이다.

"확 불 켜버린다?"

"그러든가."

"술래잡기가... 좀 지나치단 생각 안 들어?"

따뜻한 기운 하나가 등 뒤에서 나를 감싸 안았다. 부드러운 입김이 귀를 스쳤다. 뒤돌아서 그를 잡으려는 찰나 조금은 냉막한 언어가 나를 멈춰 세웠다.

"그전에, 내 질문부터 대답해봐. 오늘 기다렸던 사람이 누군지. 내가 맞아?"

"그야... 당연하지. 이 밤중에 날 찾아올 사람은 당신뿐인걸?"

머뭇거림을 눈치챘을까?

"넌 속이 뻔히 들여다보여. 그래서 좋아하지만."

그가 나를 껴안은 힘주어 끌어당겼다. 심장의 울림이 등줄기를 따라 흐르며 찌르르한 전기를 만들어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날 기다렸다고 하는 건지. 하지만 괜찮아. 누구를 기다렸건 지금 너와 함께 있는 건 나니까."


그의 목소리는 분명 내가 기억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끝에 분명한 울림이 있지만 거칠고 낮은 목소리. 목소리는 한 사람을 온전히 대변할 수 없고 그의 심장소리는 후와 달랐다. 이 남자가 나를 가끔 찾아오듯, 나는 지금 이 순간만 그를 사랑하면 된다.


"무슨 생각해?"

"아냐, 아무것도."

그의 팔은 따뜻하고 포근하다. 부족한 용기와 온기를 채워준다. 그와 함께라면 어둠 속에서도 잠들 수 있다. 후를 떠올리며 해안을 떠돌지 않아도 된다. 깊이 파고들수록 선명하게 심장소리가 들렸다. 잔잔하고 드물며 규칙적이다. 덩달아 나의 심장은 가빠온다. 비난해도 어쩔 수 없어. 내게는 당신이 필요하니까. 그가 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의 입술이 나의 이마에 닿는 것이 느껴진다.

"괜찮아. 누구도 널 비난하지 않아. 지금 이 순간만이라도 빛을 완전히 밀어내면 돼. 전에 내가 말해줬지? 빛과 꿈은 영원의 속도로 멀어진다고. 네가 빛을 밀어낼 수 있는 만큼 꿈은 가까워질 거야. 그리워하는 그를 만나. 깊은 꿈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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