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점 주장

덕분에

by 작가 전우형

난 절망하지 않아, 라는 말은 수시로 절망하는 이를 위한 주문이다. 절망을 경험해본 적 없는 이는 그 단어를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가 습관처럼 이 말을 내뱉는 이유는 그 꽃이 자신의 가지로는 도저히 지탱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꺾인 가지는 다시 팔을 내뻗지 못하며,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되뇐다. "나는 절망하지 않아. 이까짓 일로 고꾸라지지 않아." 어느새 절망의 문턱에 선 스스로를 얄팍한 말로 위로한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걱정 마. 이대로 끝나지 않아. 포기하지 않으면 돼."


누군가가 난 절망하지 않아,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적어도 절망의 문턱에 다다랐던 사람이다. 어쩌면 여전히, 그리고 지금도 절망 앞에 서 있거나. 누군가가 난 겁이 없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는 스스로 겁쟁이임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토록 동네방네 자신의 결점을 주장하고 있는 걸까? 알아봐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노력과 끈기를. 결점을 딛고 일어서기 위한 치열한 시간들을.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인정받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을 모른다. 이유는 하나다. 자신에 대해 다 안다고 여겨서다. 다 알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만큼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오만과 착각이 우리를 맹인으로 만든다. 진화의 원칙에 따라, 쓰지 않는 기능은 퇴화된다. 그래서 자신을 보지 않으면 결국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상처로부터 눈을 돌려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스스로의 결점을 부정해도 그것은 우리 안에서 기능하고 있다. 보이지만 않을 뿐 묵묵히 가장 아래쪽 깊은 곳에서부터 균열을 만들어낸다. 선체에 물이 차오르고 배는 서서히 침몰해가지만 센서들이 고장 난 탓에 경보가 울리지 않는다. 결국 우리 스스로 침몰해가는 자기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관찰해야 한다. 자신이 어떤 말을 주로 하는지, 어떤 글에 깊이 매료되는지, 어떤 상황을 좋아하고, 주저하고, 회피하는지, 어떤 말을 들으면 기억에 남는지, 어떤 말들을 떨쳐낼 수 없는지, 무의식적으로 어딜 바라보는지. 하지만 관찰의 동력은 관심이다. 마음이 동해야 행동이 시작된다. 호기심보다는 사랑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 결점도 포용하는 사랑. 결점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결점은 그 자체로 나의 일부다. 팔다리 중 하나가 불편하다고 해서 선뜻 잘라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나 성격은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다. 불가능하다. 결점은 떼서 버리고 도망가는 도마뱀 꼬리가 아니다.


고쳐쓰기 위해서는 우선 받아들여야 한다. 초고가 아무리 꼴 보기 싫어도 우선 써야 하는 것처럼. 내 것이 아닌 상태로는 개선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고 주장해야 한다. 내가 모른다고 부정해도, 받아들이지 않아도 결점은 여전히 남아있다. 의식의 수준에서 알아차리지 못할 뿐 늘 그것들에 휘둘린다. 스스로를 도저히 볼 수 없다면 타인의 평가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하자. 물론 스스로 보는 눈과 타인의 말을 들을 귀를 동시에 갖추면 더 좋다. 하지만 둘 중 하나라도 있으면 다행이다. 둘 다 없는 사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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