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책을 펼쳐 든 건 아마도 인쇄본을 종이봉투에 담아 우편 창구에 제출한 다음이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마도' 책을 읽겠다고 가방에 담은 건 그보다 훨씬 전, 유달리 감기 기운이 심했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아직까지도 감기가 낫지 않았다. 책을 덮을 때쯤이면 나을까?
그날 새벽, 아버지는 물을 마시러 부엌에 들어갔다가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난로에 손을 쬐듯 냉장고 불빛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다음날 아버지는 남자를 동네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에 데리고 갔다. 사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사라. 아버지는 냉장고에 먹을 것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문을 아무리 오래 열어두어도 냉장고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냉장고를 조금 손봐주었다. 남자는 몽유병을 앓았다. 아버지는 냉장고에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도록 늘 신경을 썼다.
[윤성희 소설집, '감기' p.86~87]
변화는 더디고 어렵다. 타인을 낫게 하는 건 더욱 어렵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옆에서 지켜보는 것뿐. 그가 스스로 괜찮아질 때까지 믿고 기다리는 것뿐. 가끔 그가 너무 절망에 빠지거나 힘겨워서 포기하지 않도록 약간의 힘을 보태주는 것뿐. 냉장고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난로에 손을 쬐듯 두 손을 내민 남자를 위해 빈 냉장고를 채워 주고 냉장고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해 준 저 아버지처럼.
나는 카페에서 늘 앉던 자리에 앉아. 먹먹한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을 보면서. 오늘따라 유난히 커피가 맛있네 하며. 가끔 부는 바람에 버드나무가 흔들리는 횟수와 하나둘씩 떨어지는 아직 푸른 잎의 개수를 세어보려다 순식간에 삼십을 넘어가는 것을 보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똑 똑. 문을 두드리듯 더치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고, 나는 박자에 맞춰 기억에 노크를 한다. 똑. 똑. 똑. 꽤 예전 기억 같기도 하고 바로 어제 모습 같기도 한 그 사람이 나를 느끼고 돌아볼 때까지. 확인하고 싶다. 마음속에 머물던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를 미소 짓게 하는 무던하고 고요하고 작고 곧은 그림자. 문득 그 안에 몸을 웅크린 채 앉아있고 싶었던 동그랗고 짙은 그림자.
"오늘 새벽에 남자 친구가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새로운 사람이 생겼다고." 나쁜 사람이군요,라고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그녀가 큰 소리로 말했다. C는 그녀 어머니의 무좀을 치료하기 위해 갖가지 민간치료법을 공부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는 자식들처럼 슬프게 눈물을 흘렸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녀를 괴롭혔다는 전남편 이야기를 듣고서는 자기는 앞으로 소주를 한병 이상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게다가 전봇대에 오줌을 누고 있던 전남편의 뒤통수를 몽둥이로 후려친 적도 있었다. "다만 제가 참을 수 없는 건." 그녀는 딸꾹질을 했다. "그 전화가 콜렉트콜이었다는 거예요."
[윤성희 소설집, '감기' p.108~109]
집사람은 내게 정말 잘해주는데 나는 정말 잘 까먹는다. 집사람은 지금도 백도 복숭아를 깎아서 내게 가져다주었다. 문을 아주 조금 열고 이마를 빼꼼 내민 채로 내가 알아차리기를 기다리며. 집사람은 짓궂고 장난이 많다. 다른 데서는 안 그러는데 내 앞에서는 배를 보이며 누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온갖 장난을 치고 관심을 끈다. 나는 평소에 웃음이 없는 편이다. 아마도 내가 웃는 시간의 오 할 정도는 집사람이 저렇게 장난을 걸어올 때가 아닐까. 백도 복숭아에는 새끼손가락 반 만한 플라스틱 포크가 꽂혀 있었다. 실용성은 거의 없는 물건이었다. 아담한 크기에 끝이 뭉툭해서 귀엽긴 했다. 하지만 포크를 들면 복숭아만 쏙 빠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내가 두 번쯤 실패하자 아내는 웃으며 그건 장식용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나는 또 피식 웃고 말았다.
아마 지금쯤 제가 깨어났을 거예요. 그녀가 핸드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쌍둥이가 태어난 건 오전 아홉 시쯤이었고요. 37주 2일이었을 거예요. 쌍둥이 만삭은 37주거든요. 첫째가 나오고 5분 뒤에 둘째가 나왔죠. 마취 상태였으니까 직접 본 건 아니고 저도 전해 들은 거예요. 노산에 쌍둥이라 걱정이 많았죠. 저혈당 때문에 자주 쓰러졌어요. 임신성 당뇨 측정은 결국 실패했죠. 빈 속에 이상한 맛이 나는 용액을 잔뜩 마셨는데 하필 그날은 정밀 초음파를 하는 날이었어요. 쌍둥이를 다 본다고 초음파 기계로 배를 꾹꾹 누르면서 이리저리 돌려대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결국 검사를 받다 말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속에 든 것들을 모두 토해내고 말았죠. 그래 봐야 그 주황색 용액뿐이었지만 말이에요. 다행스럽게도 다시 검사하지는 않아도 됐어요. 죽을 먹으면서 측정해도 터무니없이 낮을 정도로 저혈당이 심했거든요. 혈당을 측정하던 간호사가 지금 재면 높게 나올 텐데, 하고 걱정하더니 막상 수치를 보고 나서는 아무 말도 없었죠. 팔십몇이라고 했던가? 그녀는 자기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가 그토록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나는 그렇게 자주 쓰러졌는데 무섭진 않았냐고 물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날따라 몹시 더웠고 그녀와 나는 비지땀을 흘리며 걸었다. 아니, 비지땀을 흘린 건 나뿐이었나? 그녀는 콧등에만 송골송골 땀이 맺혔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