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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Aug 31. 2022

환절기

부모 에세이

학교 수업에 놀이 축구, 태권도까지 마치고 온 둘째 아이는 혼이 나간 표정이었다. 그 좋아하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용케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병든 닭처럼 고개를 꾸벅꾸벅하는 꼴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밀린 학습지를 억지로 하는 모양이었다. 엄마가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을 텐데 기억하기로 아마도 학습지 그날분을 마쳐야만 닌텐도 스위치를 할 수 있다는 조건이었지 싶다. 그렇게라도 해서 공부시키고 싶은 엄마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그렇게 조건부로 등 떠밀리듯 하는 공부가 소화나 될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가 자율과 책임을 핑계 삼아 거의 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없는 타입이다. 아내가 저렇게라도 애들을 챙기고 거들지 않으면 셋 중 하나가 집에 없어도 모를지 모르니 사실 난 아이 양육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하는 셈이다.

대충 삼십 분쯤 지났을까? 안방 침대로 슬그머니 와서 누운 둘째 아이는 이내 잠이 들어 있었다. 욕심과 시샘이 많은 둘째답게 비교에 능하고 자기가 가진 것들에는 대개 만족을 못한다. 침대 문제도 비슷한데 아들 둘이서 쓰는 방에 들여준 이층 침대를 유독 둘째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매트리스가 얇아서 등이 배긴다나.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몰래 안방 침대에 누워 도둑잠을 잔다. 그러다 속 좁은 아빠에게 들키면 실쭉 웃으며 도망가지만. 방을 따로 구해주고 가구도 마련해 주었으면 적당히 만족하고 써주면 좋을 것을. 하지만 오늘따라 입을 헤 벌린 채로 침 흘리며 뻗은 둘째를 보고 있으니 그저 저 쉽게 지치고 운동신경도 없는 놈이 오후 내 몸 쓰는 일을 했으니 오죽 피로에 절었을까 싶어 그저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선잠에 들었을 뿐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떡 일어나더니 거실로 나갔다. 밤 열 시쯤 되었을 때 부엌으로 물 마시러 가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 꺼진 거실에 둘째의 얼굴만 달걀귀신 마냥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저도 도둑질하다 걸린 것 마냥 적잖이 놀랐는지 화들짝 손에 쥐고 있던 뭔가를 등 뒤로 숨기는 게 보였다. 늦었으니 그만 치우고 들어가 자라고 하자 둘째는 뭐가 그리 억울한지 금세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역정이 났다. 밤늦었으니 자라는 게 열 살 넘은 사내자식이 울 일인가. 게임 못해서 안달복달하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나는 수십만 원 하는 게임기라도 쓰레기통에 처넣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자연 튀어나간 말은 곱지 않았다. 얼른 자라는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는지 애들 방은 한참 동안이나 불이 켜진 채로 남아 있었다.


퇴근 깨에는 아내가 날카로웠다. 메타분석 연구가 잘 진행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연구팀이 모이는 대학 사무실로 나가 함께 작업을 하는데 검색식을 만든 게 뒤늦게 오류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어느 학술 사이트에서 검색 결과로 이백만 건이 나왔다고. 그 말을 하는데 장모님께 전화가 왔다. 자연 아내의 전화받는 목소리도 심드렁하고 귀찮음이 묻어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니는데 의견이 맞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답답해서 넋두리할 겸 전화하신 모양새였으나 안타깝게도 아내도 엄마의 투정을 들어줄 아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전화는 대충 오분을 못 넘기고 마무리됐다. 잠시 후 첫째에게서도 연락이 왔다. 아침부터 친구와 저녁 야시장을 구경하고 싶다며 청북을 다녀오겠다는 건으로 엄마와 갈등이 있었다. 야시장 구경이야 별게 아니나 문제는 장소와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중학생이 되고 머리가 굵어진 첫째는 엄마의 통제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아내는 첫째의 야시장 구경을 탐탁지 않아했으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어쩔 수 없이 허락하며 대신 일곱 시까지만 보고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오후 여섯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첫째는 아내에게 전화하여 복귀를 미루는 협상을 걸어왔다. 안 그래도 신경이 날카로웠던 아내에게서 좋은 말이 튀어나올 리 없었다. 날 선 공방을 주고받던 설전 끝에 아내는 쏘아붙이는 뉘앙스로 전화를 끊었고, 나는 삼엄한 기세에 눌려 결론이 어떻게 낫는지 묻지 못하고 그저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 대충 일곱 시 반쯤 첫째가 집으로 돌아온 걸 보면 오늘은 개길 날이 아닌가 보다 하고 딸이 한발 물러선 모양새였다. 하지만 집에 온 첫째는 입이 툭 튀어나온 채로 잘 보고 왔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더니 홀로 흐느적흐느적 저녁을 대충 차려먹고는 내내 어둠 섞인 기운을 뿜어내며 집안을 유령처럼 돌아다녔다. 나는 그 꼴이 눈에 거슬려 문을 닫아버리고 방에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아들 두 녀석 어서 자라고 들여보낸 뒤 한참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이 켜져 있어 가보았더니 첫째가 애들 잘 방에서 여태껏 버티고 있는 게 아닌가. 불 끄고 할거 있으면 네 방 가서 하라는 말에 첫째는 그동안 씻고 있었다며 돼먹지 않은 핑계를 시전 했다. 알았으니까 가라, 고 하자 또 그 유령 같은 발걸음으로 느릿느릿 자리를 치우고 일어서는데 한참이 걸렸다. 보고 있다 속이 터져서 다시 자리를 피해버렸다.


나는 나대로 며칠 째 컨디션 난조로 힘들어하고 있었다. 어디가 죽게 아픈 것도 아닌데 지그시 곳곳에 불편감이 맴돌고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기는커녕 밤새 몽둥이찜질이라도 당한 듯 삭신이 쑤셨다. 거기다 뭔가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있는데 정작 아우트라인조차 손에 잡히지 않아서 답답증까지 겹친 상태였다. 일주일 새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널을 뛰고 밤공기가 급격히 서늘해진 것이 곧 가을이 닥칠 모양새다. 비 맞을 일도 적지 않고 방학은 방학대로 힘겹더니 애들이 줄줄이 개학하고 아내도 나도 서로 다른 신분과 역할로 개강을 맞이하자 서로 여유가 없어졌나 보다. 당장 몸이 삐쩍 마른 막내부터 입에 수포가 잡히고 눈은 흰자위가 퉁퉁 붓고 난리도 아니다. 그런 와중에 저녁에 잠이라도 푹 자라고 입이 마르고 닳도록 말해도 듣질 않으니 답답하기도 하고 아프거나 말거나 니들만 괴롭지 하기에도 부모 마음이 또 그렇지 못하니 내내 명치 깨가 쿡쿡 쑤시고 뭘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니 먹고 안치운 과자봉지며 핫도그 막대기며 바나나맛 우유 빈병이며 하는 것들에 잔소리가 불어난다. 샤워할 때 벗어놓은 옷들 빨래통에도 못 갖다 넣냐며 속에서 흰소리가 나오고 매양 쌓여있는 음식물쓰레기며 설거지거리들 보면 내가 이 집 식모로 취직했나 싶다. 바쁘고 숨차 하는 아내 고생하는 게 싫어 아무 말 없이 하다가도 애들 저래 속 없이 행동하는 거 보고 있으면 불쑥불쑥 화가 치미는 게 내 마음도 요즘 환절기는 환절기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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