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모든 소리가 바로 옆에서 놀라게 하듯 속삭여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시작된 이명. 정규방송이 끝난 새벽, 불 꺼진 거실 한쪽 구석에서는 홀로 시위하듯 텔레비전이 유령처럼 허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텔레비전에서 쏟아져 나온 백색소음들은 애써 이룩한 밤의 고요를 점령군처럼 짓밟았고, 예리한 칼날로 그 백색소음 덩어리를 한 올 한 올 포를 뜬 것 같은 날카로운 통증이 방향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동시에 고막을 후벼 파기 시작했다. 나는 손을 대기만 해도 보일 듯 말듯한 선이 그어지고, 그 선을 기점으로 얇고 투명한 살갗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서서히 당겨지며 어느새 선홍색의 맑은 피가 배어나는 환영을 본다. 곧 탁한 빛으로 변한 따뜻하며 점성이 느껴지는 액체는 어느새 굳어 일직선으로 잡아당긴 실지렁이 같은 자국을 새긴다. 나는 힘겹게 뜬 눈을 다시 감는다. 귓속으로 차가운 바람 수십 가닥이 통과해 가는 느낌에 진저리 치며 나는 또 다른 환상을 마주한다. 눈을 덮은 차가운 헝겊 너머로 들리는 덜그럭거리는 소리들. 성난 관중처럼 주위를 빈틈없이 채운 알코올향. 피가 몰릴 정도로 뒤로 젖혀진 머리. 힘겹게 벌어진 입. 그리고 다시 닫을 수 없는 입. 창백하고 핏기가 마른 입가에는 희미한 주름이 서리처럼 돋아난다. 정중하고 푹신하지만 도저히 그 위에서만큼은 잠들 수 없는 차갑고 소름 끼치는 공간에서 나는 저항할 수 없이 누워 있다. 그리고 들리는 소리. 텔레비전에서 쏟아지던 백색소음을 얇게 포를 뜬 것 같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모질도록 시린 바람을 풍압에 실려 한 점으로 쏘아 보내지고, 딱딱한 무언가가 교묘히 갈려나가는 거칠고 인위적인 진동을 느끼며 나는 몸을 부르르 떤다. 저릴 만큼 주먹을 말아 쥔다. 닿을 리 없는 이를 악문다. 그러다 비로소 그 모든 것들이 온통 새하얗게 변한다.
끝났습니다.
나는 눈을 뜬다.
비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나는 힘겹게 고개를 털고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연다. 서늘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틈을 파고들고 나는 나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린다. 나는 베란다 창틀 위에 발을 올린 채 밖을 내다본다. 창틀에 고인 빗물이 발바닥에 닿는다. 먼 어둠 속으로 색이 짙어진 콘크리트 바닥을 본다. 머리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그 소름 돋는 꿈의 잔상을 털어내려 애쓴다. 희영이 다가와 어깨 위로 얼굴을 내민다.
왜 깼어요?
빗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진다. 희영은 치켜든 발끝을 내린다. 그녀의 턱이 내 어깨에 묵직하게 얹힌다. 나는 머리를 기울여 희영에게 기댄다. 이명이 잦아드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속삭인다.
그냥. 빗소리가 들려서.
이리 와봐요.
희영은 가방에서 연보라색 수첩을 꺼낸다. 모서리가 벗겨지고 가죽이 삭을 대로 삭아서 펼칠 때마다 틈이 벌어질 정도로 오래된 수첩이었다.
어제 책장에서 찾았어요.
희영이 수첩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색연필로 성글게 칠한 그림들이 보였다.
누가 그린 거예요?
내가 묻자 희영은 으쓱하며 코를 훔친다.
잘 그렸다. 언제 그린 거예요?
아마... 중학생 때쯤?
나는 끄덕였고, 희영은 다시 몇 장을 더 넘겼다. 나는 그 속에 담긴 그림들을 보았다.
이건 누구예요?
내가 가리킨 그림 속에는 앳되나 희영이 분명한 여자아이가 한 여자의 무릎에 앉아있었다.
아.. 그거.
희영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엄마예요.
엄마?
네. 고모가 아빠 유품에서 찾았다며 사진 한 장을 주셨거든요.
희영은 성희에게 받아 든 사진을 손에 꼭 쥔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손매를 일그러트리며 한없이, 한없이 그 속에 든 한 사람의 얼굴을 뜯어본다. 정수리에서 흐드러지듯 이마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지나 외까풀진 눈, 옆의 작은 점, 수수한 귓불을 만진 뒤 턱선을 따라 가운데로. 천천히 움직이던 희영의 손끝은 가늘고 얇은 아랫입술에서 멈춘다. 희영은 갑자기 뜨거운 것에 닿기라도 한 듯 손가락을 오므린다. 그리고 사진을 고요히 품에 안는다.
사진 속에는 여자가 있었어요. 잔물결이 바다 너머에서 끝없이 이어지는듯한 파란 원피스 차림의 여자가 나무 의자에 비스듬하게 걸쳐 앉은 사진이었어요.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고모가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어요. 이 사람이 내 엄마구나. 한참을 보는데 처음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생각이 없다가, 문득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아득한 통증이 치밀었어요. 죽은 엄마 사진을 보는데 떠오르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 사무칠 만큼 싫었어요.
그 말을 하는 동안 희영은 수첩 속 그림을 자꾸만 매만졌다.
그 후로 오랫동안 엄마 사진을 다시 꺼내 보지 않았어요. 그러다 중학교 때 학교 숙제로 가족사진 그려오기가 있었어요. 고모랑 사는걸 학교 선생님도 다 아는데 이상하게 고모랑 지수가 들어간 가족사진은 그리기 싫었어요. 그래서 그때 저 사진을 처음으로 다시 꺼내봤죠. 사진 속 엄마를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저를 그렸죠. 선생님은 어릴 때 사진이구나, 하셨지만 별말씀 안 하셨어요.
그 수첩 나한테 주세요.
희영은 치켜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걸 달라고요?
희영은 잠시 생각하다가 수첩을 조심스럽게 닫았다.
그래요, 그럼.
나는 희영이 내민 수첩을 받아 들으려 했다.
잠깐만요.
희영은 수첩을 가져가 무릎 위에 다시 펼쳤다.
이상한 얘기 써둔 거 없나?
공상을 자주 한다고, 희영은 장난스레 말한 적이 있었다. 오래전 일기장을 털린 적이 있다고. 검열하듯 수첩을 한 장 한 장 꼼꼼히 살피는 희영의 정수리를 보며 나는 그녀의 앙다문 입술을 상상했다. 희영은 기척 없는 내가 수상했는지 나를 향해 한번 눈을 흘기고는 수첩을 슬그머니 내밀었다.
또 웃고 있었죠?
나는 손을 흔들었으나 희영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나 부인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정말 웃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 웃음들에는 정반대의 것들이 뒤섞일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걷잡을 수 없이 휘말리고 마는 성급한 슬픔 같은 것. 짚어낼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지점에 고인 채 바닥까지 소금기가 차 있던 눈물 같은 것. 이년 전 내가 울분에 차 그것들을 터트렸을 때도 희영은 내 앞에 있었다. 나는 그녀의 감정이 배제된 언어들을 듣다가 잠금장치를 덜컥 풀었고, 희영은 갑작스레 오열하는 나를 차분하고 정직한 태도로 달래주었다. 그날 나는 일기장을 들킨 희영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웃지도 울지도 않던 내가 웃는 사람이 된 건 그런 이유였다. 그러나 내게는 이런 구구절절한 속내를 적절히 설명해내지 못하는 유서 깊은 결핍이 존재했고, 유일한 대답은 이전과 다른 웃음. 우습거나 즐거워 보이지 않는 웃음.
그보다도 나는, 더 늦기 전에 연보라색 수첩을 당겨오기로 했다. 희영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수첩을 내주며 말했다.
나중에 보세요. 지금 말고.
나는 평소보다 크게 끄덕인 후 얼른 수첩을 가방에 넣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