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10)
10.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
10.
나는 거울 앞에 선다. 눈앞의 남자는 앙상하다. 바람이 눈을 모두 쓸어간 나뭇가지처럼 헐벗은 골격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나를 바라본다.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 한다. 늘어뜨린 팔이 솜씨 없는 인형사의 손에 맡겨진 꼭두각시처럼 제멋대로 휘청거리고, 손가락들 역시 기묘한 각도로 꺾여있다. 그는 거울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듯 내게 달려든다. 나는 차마 물러서지 못한 채 우물 같은 그의 눈동자를 노려본다. 고장 난 양철로봇처럼 턱이 덜그럭거리지만 거울 속의 그가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한 것처럼, 나도 가까스로 딱, 딱, 이만 부딪을 뿐이다.
시간을 빨리 보내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건 내 주변을 둘러싼 눈빛 다발들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눈빛들은 언제나 곁을 맴돌았다. 잠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텔레비전을 볼 때도, 빨래를 널 때도 그 눈빛들은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집 밖으로 나가면 그 눈빛들은 지나치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들인 양 행동했다. 길가에서, 버스에서, 시장에서, 영화관에서도 나는 마찬가지로 그들의 존재를 느꼈다. 가끔은 따갑게, 가끔은 부드럽게, 가끔은 애잔하게, 그들은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그 시선이 결국 내게 닿아 있음을 느꼈다.
멈춰 있을 때 시간은 가지 않는다.
내가 움직일 때 시간도 함께 움직인다.
생각은 움직임이 멈출 때 가장 활발하다.
고로 생각을 지우려면 나는 지우개처럼 나를 닳아 없애야 한다.
내가 무료함에 젖거나 잠시라도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면, 낚시 바늘에 꿰인 갯지렁이처럼 어떤 이미지들이 사정없이 몸을 비틀어대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장면으로부터 시선을 돌리듯, 빨간색 가스난로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그러면 심지에서 돋아난 손가락 한 마디쯤 되는 파란 불꽃이 아지랑이처럼 몸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 불꽃에 시선을 접착한 채로 세계를 떠받치는 어떤 거인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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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발은 절반쯤 바닥으로 파고들었고, 온몸은 땀에 전 지 오래다. 그는 파랗게 질린 무릎을 사십오 도쯤 구부린 채 파르르 떨고 있다. 하늘을 이듯 뻗어 올린 손에서는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고 피부는 현무암처럼 검게 죽어 있다. 옆으로 숙인 머리와 같은 높이로 수평을 맞춘 어깨에서는 맷돌로 갈아낸 듯한 고운 핏가루가 끊임없이 비산 되어 바람에 날린다. 거인은 이 조악한 땅에 머물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삶이 영원할 거라 믿는 가엾은 이들을 내려놓지 못한다. 아래로부터 차오르는 냉기를 견디며 그들과 스친 시간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생명이 움틀 수 있는 공간으로 새로 고치는 작업을 무한히 반복하는 그에게 유일한 낙은 헤아릴 수 없는 얼굴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는 것뿐이다.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기분이었겠지. 그것도 처음 가보는 길을. 어쩌면 너는 그 길을 늘 낯설게 느꼈을지도 몰라.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현재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을 테니까. 내가 발을 디딜 곳이 여전히 두터운 겨울일지, 곧 녹아서 부서질 봄일지, 이미 쏜살같이 흐르는 여름일지, 그는 도무지 알 수 없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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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느새 머물던 허공의 한 지점으로부터 시선을 회수해 다시 빨간색 가스난로를 본다. 저 불꽃이 사그라들면 이곳은 어떻게 변할까? 작고 푸른 불꽃의 몸부림 같은 춤사위는 더욱 투명하고 강렬해진다. 불꽃에서 뻗어 나온 열선이 공기를 지피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남은 시간을 세듯 한번, 또 한 번 심장의 두근거림을 가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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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영을 볼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때도 나는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그 거인처럼 지나쳐온 이들의 시간을 떠올릴 수 있을까? 움직임을 멈춘 채 온갖 생각들로 빠져드는 사이, 희미하던 고리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분명한 선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 선은 성당이 되었다가 커다란 다리로 변했고 파란 기와가 되었다. 울타리 너머에서 내게 손짓하는 마른 얼굴로 변했다가, 흘러내리는 눈동자, 높고 투명한 하늘, 화끈거리는 뺨, 일으켜 세우는 손, 줄에 매달린 아이, 비명, 원망, 불 꺼진 방, 그랜드 피아노, 그리고 마지막에는 금강에 둥둥 떠있는 공산성의 노랗고 동그란 불빛.
나는 부정할 수 없는 한 사람의 기억을 목전에 두고 눈을 감는다. 활시위를 당기듯 공기를 빨아들이고 과거의 어느 한 지점을 조준한다. 노회한 작사가처럼 담아야 할 장면과 그 속에서 건질 글감들을 세심하게 분별한다. 그러나 글 쓰는 사람이 점점 말이 줄어드는 것처럼 하나의 통로를 찾은 욕구들은 다음에도 같은 문 앞에 줄을 선다. 아니, 서려한다. 이제 그곳만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임을 주장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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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걸으면 나를 완전히 잊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눈을 감고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매 걸음마다 실눈을 뜨고 내가 강물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확인했다. 가끔 그런 나를 흘겨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그들의 킥킥대는 웃음소리를 애써 모른 체하며, 보란 듯이 다시 세 걸음을 옮긴 후에 실눈을 뜨고 그들이 멀어졌는지를 확인했다. 옆에서는 금강이 아이처럼 말을 걸어왔다. 해석할 수도, 해석할 필요도 없는 말을. 그러나 눈을 보고 있으면 어떤 말이든 알아차릴 것 같은 말을. 우리는 원래부터 말하지 않고도 서로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는 것처럼, 귀를 통하지 않고도 마음속에 이미 글씨를 남긴 자연의 언어들을.
공주대교에 가까워질수록 몇 갈래로 나뉜 물살들이 앞다투어 속도를 높였고, 금강은 그들에게 화답하듯 거친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내가 그 속에서 색이 다른 울음소리를 들은 건 공원의 끝에서 되돌아오던 길이었다. 멀리 공주대교 아래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를 보았고, 나는 이끌리듯 그리로 걸어갔다. 거기서 희영은 마치 석상처럼 물살을 향해 앉아 있었다. 무릎을 감싼 두 손에 턱을 고이고서. 희영은 말하는 법을 잊은 사람 같았다. 나는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는 그녀 옆에서 지극히 나를 경계하며 서 있었다. 더 다가가도 괜찮을까. 그러나 밤공기가 재잘거리고, 달이 강물 사이에서 빛을 발하는 곳에서 나는, 나를 붙들고 있던 응력들이 스르륵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그 다리 아래 세상은 내가 걸어온 세상과 다른 공기와 온도 속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마법처럼 오랜 기억들을 되살렸다. 나는 한없이 빠르게 증발하는 시간들을 보았다.
희영의 옆에 앉은 동안 나는 금강이 유독 그곳에서만 빨라진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처음으로 나를 앞질러갔다는 것도. 희영은 스스럼없이 내게 기댔다. 나는 그 순간 멀미가 일 것 같았고, 조금고 움직일 수 없었다. 소중한 보석이 조각날 것을 걱정하듯, 나는 숨을 멈추고 어깨를 고정하기 위해 애썼다. 어쩌면 그렇게 안간힘을 쓰느라 척추가 파르르 떨렸을지도 모를 일이나, 희영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기댄 머리로 고른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희영은 그런 채로 잠시 머물다 일어섰다. 나는 희영을 뒤따라 걸었다. 이대로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괜찮은 걸까.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불안을 거둬들이듯, 아주 먼 곳만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곁을 맴돌던 눈빛들이 말했다. 그 목소리가 위안인 적은 없었는데. 나는 편안해진 채로 그녀가 밟은 자리를 따라 밟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빛을 발하는 공주대학교의 간판을 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