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바닐라 라떼(1막-6)

소설

by 작가 전우형

<1막-6>


은행을 나온 우진은 일단 가까운 마트로 갔다. 세상은 완전하지도 안전하지도 않았다. 누군가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노리고 있고 나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우진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런 결기뿐이었다. 아직 퇴근 시간이 안 됐음에도 마트는 붐볐다. 우진은 카트를 끌고 실내장식 코너로 가 암막커튼을 골랐다. 가장 두껍고 안이 전혀 비치지 않는 걸로 집어 드는데 무게가 꽤 두툼했다. 우진은 직원의 도움을 받아 커튼과 커튼봉을 실었다. 카트를 미는 느낌이 묵직해졌다. 먹거리와 생필품도 넉넉히 챙겨야 했다. 우진은 한동안 집안에만 머물 작정이었다. 최대한 집의 보안을 철저하게 지키며 바깥출입은 혼자만 할 생각이었다.


계산을 마친 우진은 주차장으로 올라가던 중 3층 열쇠가게에 들렀다. 지문인식 기능이 있는 디지털 도어록을 보고 싶다고 하자 우진의 얼굴을 살핀 점원이 마치 AI 카탈로그처럼 설명을 시작했다. 출입이력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어 집에 누가 드나들었는지를 알 수 있고 집 밖에서도 휴대 전화로 도어록을 열고 닫을 수 있으며 열림과 잠김 상태를 언제든 체크할 수 있는 제품이라고 했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오는 손님을 위한 1회용 비밀번호도 설정할 수 있다는 설명이 신경을 조금 긁긴 했지만(대체 그런 걸 왜 설정해 준단 말인가?) 우진은 큰 고민 없이 그 제품을 선택했다. 50만 원이라는 가격도 우진을 흔들지 못했다. 우진은 다만 점원에게 이거보다 더 좋은 건 없죠? 하고 물을 뿐이었다.


우진은 돌아서려다 방문에도 설치할 수 있는 건 없냐고 점원에게 물었다. 그러자 점원이 사정을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했다. 점원이 아니라 사장이었나. 우진은 그의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자신은 빨리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인데, 점원 복장을 한 사장은 우진의 집까지 따라나설 기세였다. 애초 도어록 설치를 직접 해드려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던 걸 겨우 떼어놓던 참이었다. 우진은 매대를 쭉 훑어보다 손가락으로 하나를 짚었다. 그것은 접지식으로 서로 붙어 있다가 문이 열리면 동전만 한 스피커에서 딩동 하는 경보음이 울리는, 오래된 카페나 가게에서나 볼 수 있을 법 한 작고 허접한 장치였다.


***


요즘 들어 연령은 우진이 집에 들어와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거실에 앉아 있다가도 그가 오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연히 분위기는 냉랭해졌다. 연령은 우진이 자신을 집에 가둬두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우진은 연령이 집에 머무는 간단한 것조차 참지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이해하기 싫은 마음이 만나자 부부 사이는 금세 위기에 놓였다.


우진은 전동드릴을 꺼내 도어록을 설치하고 작동 시험을 했다. 사용법을 알려주기 위해 연령을 불렀지만 안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우진은 거실 창가에 커튼봉을 고정하고 암막커튼을 걸었다. 밖이 전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빛도 들지 않았다. 커튼을 친 만큼 거실은 밤과 낮으로 나뉘었다. 우진은 단단히 커튼을 닫고 불도 꺼버렸다. 안방 커튼은 연령의 반대로 설치하지 못했다. 대신 불투명 창을 반드시 닫아두었다. 안방 문에도 우진이 무언가를 설치했는데 그 후로 문이 열릴 때마다 딩동하고 벨이 울렸다. 연령이 안방에만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CCTV도 설치하지 그래? 연령이 비웃듯 우진에게 말했다. 우진은 묵묵히 휴대 전화로 부동산 매물을 검색할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우진과 연령의 대화에는 긴 가뭄이 찾아왔다. 그러나 우진은 일상이 회복되어 가고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당신도 이해할 거야. 우진은 연령이 보는 앞에서 그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우진의 경계심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그는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이사만 끝내면. 우진은 긴 터널의 출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부동산 아주머니에게서 연락이 왔고 나들이 삼아 보러 가자는 말에 연령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


우진은 집을 나섰다. 출산을 앞둔 아내가 해가 잘 드는 집을 좋아한다고 하자 부동산 아주머니는 딱 맞는 집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가 장담한 대로였다. 방 세 개 중 두 개를 합쳤고, 거실과 부엌은 적당한 크기였다. 어지간한 방 크기의 드레스룸과 팬트리가 있었고 분양 옵션으로 확장 시공을 마친 집이었다. 30층 아파트 꼭대기 층이었는데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끗하고 보안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었다. 우진은 근처에 다른 높은 아파트가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관리비가 제법 나올 기세였고 집값은 이전 집보다 두 배 가까이 비쌌지만 은행 직원인 우진에게는 수단이 많았다. 연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진은 이사 날짜를 잡았다. 마침내 그날이 됐다.


우진이 사다리차와 이삿짐 트럭이 들어설 공간을 확보하느라 전화를 돌리고 올라왔을 때, 이사업체 사람들은 난감한 얼굴이었다. 책임자로 보이는 사내가 말했다.

아내분께서...

연령은 현관에 드러누워 있었다. 우진이 일으켜 세워보려 했지만 연령은 눈을 꼭 감고 버텼다. 일단 이사업체 직원들을 물린 뒤, 우진은 연령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연령은 작정한 듯 말했다.

사람들 당장 돌려보내. 그전엔 아무 말도 안 해.


그녀는 통증이 심한 듯 부푼 배를 만지며 인상을 썼다. 우진은 포기하고 책임자를 찾아 양해를 구했다. 그는 위약금이 있을 거라고 말하며 사람들을 이끌고 돌아갔는데 청구된 위약금은 이사비용과 맞먹었다.


두 사람은 결국 심한 말다툼을 했다. 연령은 다음 날부터 제멋대로 산책을 나갔고 우진은 이틀 째 홀로 있다가 은행으로 출근했다. 옆에 앉은 직원이 휴대전화만 쳐다보는 우진을 보며 그냥 집에 가, 하고 말했지만 우진은 고개를 저었다. 일주일 후 우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병원이라고 하는데 우진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단어가 빙빙 돌며 깨어져나가는 경험을 우진도 했다. 곧 그는 희진에게서 성폭행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연령의 표정과 같아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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