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막-5>
우진이 집 밖으로 나간 몇 분이 연령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순간적으로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고 우진이 돌아온 것과 같은 시점이었다. 복잡한 잔상들이 솟구치듯 눈앞을 할퀴고 지나갔다. 또 지진이 이는 모양이었다. 연령은 숨을 몰아쉬었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 여과지가 한 장 놓인 기분이었다. 차가운 헝겊처럼 긴장된 마음이 입을 막아왔다.
진정해, 여보.
그러나 연령의 마음속에는 여진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가 진정하라고 할수록 진정할 수 없는 마음의 진폭이 커졌다. 아까처럼 또 세상이 하얘지려고 했다. 북을 두드리듯 얼음 속을 떠돌던 죽은 눈동자가 눈앞을 아른거리며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발톱을 꺼낸 앞발 하나가 사납게 머리를 내리쳤다. 연령은 정신을 잃었다. 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진의 목소리도 들렸다. 공기총을 당기던 손가락도 보였다. 한없이 멀어지던 등번호가 보였다. 더 멀어지면 안 돼. 더 멀어지면 안 돼.
령아!!!!
외마디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트랙에 쓰러지던 연령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연령은 우진의 다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연령이 작게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우진은 연령의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답하는 대신 손을 뻗어 연령의 이마를 쓸었다.
많이 놀랬나 보다. 일단 누워 있어.
우진이 다리를 빼며 작은 베개를 연령의 목에 끼워주었다.
연령은 그래, 하고 이마를 짚었다. 거인들이 줄지어 걸어가기라도 하는지, 땅이 자꾸만 흔들렸다.
우진은 깨진 컵 조각을 봉투에 담고,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자잘한 파편들이 천 너머로 만져졌다. 우진은 꼼꼼히 그것들을 닦아냈다. 연령은 문득 손에 피가 묻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연령은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핥았다. 컵을 떨어트렸던가. 연령은 갑자기 목이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소파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몸이 한쪽으로 기울며 서늘한 느낌이 아랫배를 스쳤다.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으로 똑똑. 하얀 양말이 곱게 염색된 것처럼 짙은 와인색이었다. 연령은 그 순간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졌다. 그때 우진이 물었다.
왜? 어디 안 좋은 것 같아?
어디가 안좋으냐니. 당신은 방바닥을 적신 이 피가 보이지 않아? 연령이 분노에 차 소리치려던 순간 웅덩이처럼 자신을 빠트리고 있던 피뭉치가 고스란히 사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연령은 의식을 놓지 않으려 애쓰며 화장실로 갔다. 우진이 따라왔지만 연령은 먼저 문을 닫았다. 우진이 밖에서 다시 물었다.
안 좋으면 어서 병원 가자.
연령은 물을 틀고 세수를 했다. 얼굴을 몇 번이고 다시 씻었다. 바닥은 깨끗했다. 양말이 물기에 젖어 축축하긴 했지만 그건 슬리퍼를 신지 않아서였다. 연령은 거울을 보며 말했다.
괜히 바쁜 사람 오게 만들었네. 나 아무렇지도 않아. 얼른 다시 출근해.
우진이 밖에서 냉큼 답했다. 아직 거기 그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오는 길에 벌써 휴가 냈어. 얼른 나와. 병원부터 가게.
연령은 아까의 피로감이 다시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녀가 문을 열고 말했다.
돌아다니는 게 더 힘들 것 같아. 쉬면 괜찮아지겠지.
우진은 자신을 지나쳐가는 연령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데 말야.
우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다.
밥 먹고 자.
우진이 연령의 볼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창밖은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 오래였다.
식탁에는 미역국과 쌀죽이 올려져 있었다. 연령은 부스스한 얼굴로 의자에 앉았다. 우진은 그녀보다 늦게 맞은편에 앉았다. 고장 난 기계처럼 미역국을 뜨는 연령을 바라보다가 우진은 집안을 한차례 쓱 훑었다.
20년도 더 된 아파트였다. 스무 평 남짓한 너비에 안방과 거실, 부엌이 넓게 빠졌고 작은방은 창고나 다름없을 만큼 작았다. 연령은 마음에 들어 했고 우진은 아이가 생기면 이사할 마음으로 집을 얻었다. 3년 계약이었고 곧 전세 만기였다. 연식으로는 드물게 베란다를 확장한 집이었다. 겉보기에는 좋았지만 외풍이 심했다. 확장이 일반적이지 않던 시절에 지어진 집이라 어쩔 수 없다고, 집주인은 말했다. 그래도 실내가 환하고 넓어 좋지 않냐고, 부동산 아주머니가 거들던 기억이 났다.
우진이 마음에 걸려 했던 것은 아파트 경비였다. 경비원 수도 적고 입구는 번호키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CCTV 몇 개로는 지킬 수 없는 세상이었다. 우진은 그때 느꼈던 불안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점도 우진을 탐탁지 않게 했던 것 중 하나였다.
이사 갈까?
미역국을 휘휘 젓고 있던 연령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미역국에 비친 식탁등이 우물거리다 보름달 같은 모양새를 되찾아갔다.
계약기간도 얼마 안 남았고... 마음이 영 그래. 이게 끝이 아닐 수도 있잖아.
무슨 뜻이야?
연령은 자신의 목소리가 떨렸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말은 더욱 차갑게 들렸다.
우연일 거야.
그녀는 단정하듯 말했다. 우진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의도적으로 진실을 덮으려 하고 있었다.
아까 그 고양이 말야.
연령은 숟가락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안 넘어갈 것 같아. 미안.
속 비면 더 힘들어.
치우지 말고 둬. 이따 먹을게.
우진은 이미 돌아선 연령의 등에 대고 말했다.
눈을 돌린다고 해서 현실이 사라지진 않아.
연령은 답하지 않고 방문을 닫았다. 우진은 아직 김이 올라오는 미역국을 잠시 바라보았다.
우진은 이사 갈 집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인근 파출소를 찾았다. 대략의 경위를 설명하고 이연령이라는 이름으로 신고가 접수된 것이 있는지 물었다. 경찰은 우진의 신분을 확인한 뒤 다시 몇 가지를 물었다.
죽은 고양이가 집으로 배달돼 왔고, 임신한 고양이였고.
네. 냉동된 채로 두고 간 모양인데 임신한 아내가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아내분께서 지인의 성폭행 사실을 알고 계셨다고요.
네. 요전에 신문에도 크게 났었던 그 병원장요.
파출소에서는 며칠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우진이 전화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
이연령 씨라고 하셨죠? 그분 이름으로 신고가 들어온 건 없습니다. 신변 보호 요청은 처리에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일단 아파트 주변 순찰 주기를 조정해 보긴 하겠습니다만, 저희도 사정이 녹록지 않아서.
신고한 사실이 없다. 우진은 머리가 아파 왔다. 경찰은 말미에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를 의식하듯 작은 목소리였다.
차라리 주변 분들께 알아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우진은 교도소를 찾았다. 병원장을 만나볼 참이었다. 면회실로 들어선 병원장은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선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우진 역시 무엇을 질문할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희진 씨의 오래된 친구라고 말했지만 병원장은 이미 많은 것에 초탈한 눈빛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말을 아꼈다. 잘 교육받고 나온 느낌이 났다.
교도소를 나온 우진은 연령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희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내일이면 일주일 얻은 휴가도 끝난다. 우진은 답답함을 안고 은행으로 향했다. 지점장은 그가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돌아온 것을 보고 상황을 짐작하는 듯했다.
가정이 우선이지. 가끔 연락 주게.
우진은 휴직을 신청했다. 옆에 앉은 동료가 안타깝다는 듯이 우진을 쳐다보았다. 우진은 그가 더 지쳐 보였다. 오후 4시 44분을 지나고 있었다. 은행 업무는 곧 마감인데 대기줄은 길었다. 마감 후에도 처리할 것이 산더미겠지. 우진은 서둘러 은행을 빠져나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