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막-4>
한동안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밀어내고 싶은 마음과 의지하고 싶은 마음 중 어느 쪽이 진짜인지 연령은 가늠할 수 없었다. 연령은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편이었다. 관계의 원동력은 진심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감추려 할수록 평행선마저 무너질까 봐 두려워했다. 그럼에도 숨기고 싶은 미움들이 있었다. 과거 늘 자신을 앞서 달리던 희진에게 느꼈던 열등감. 우진이 어린아이 취급하듯 자신을 대할 때마다 솟구치던 서늘한 마음. 다를 바 없는 너의 현실을 꾸짖고 싶어 입술이 달싹거릴 때의 마음. 억누를수록 누적되던 실망과 냉담함. 그런 스스로에게 쓰레기 버리듯 던지던 경멸. 연령은 어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어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 주장은 강한 파급력을 갖고 연령의 몸과 마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많은 감정이 교차하며 피로감이 몰려왔다. 연령은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우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진은 일단 안심한 것 같았다. 그는 정직한 남자였다. 그의 언어에 허위가 배재되었을 거라는 믿음이 연령에게는 위안이면서도 고통이었다. 연령은 천천히 응급실로 돌아갔다. 희진은 침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녀는 어서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희진이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모습을 보며 연령은 그녀가 간호사라는 사실을 확실히 인식했다. 그러나 빛바랜 기억 속 희진은 병원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희진은 병원을 극도로 꺼려했고 그런 믿음은 하나의 절실한 신앙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희진은 피를 두려워했다. 정확히는 피가 마를 때 풍겨오는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연령은 아직까지도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피가 마를 때 풍겨오는 냄새라니. 간호사는 어쩌다 하게 된 거야? 연령이 그날 물었을 때 희진은 말을 아꼈다. 혼자 살아가려면 용기가 필요했어.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그날의 대답은 그랬다.
연령은 희진과 함께 버스를 탔다. 희진이 극구 택시를 거부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사람이 많은 곳이 좋아. 희진은 그렇게 말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였다면 희진은 버스조차 타지 않을 것 같았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연령은 희진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할 수 없었다. 침이 삼켜지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연령은 희진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다. 우진의 바람대로 병원은 옮겼고, 모든 일상이 제자리를 찾는 듯 보였다. 우진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고 했다. 두 달쯤 후에, 병원장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제법 이름난 여성병원이어서 그 소식은 인터넷 맘카페를 타고 순식간에 퍼졌다. 우진은 그 소식을 식당에서 접했다. 그가 은행 건너편 국밥집에서 혼자 허겁지겁 밥을 하던 날이었다.
병원에서 언니더러 옮기라고 그랬대.
설마... 너희 언니도 그 병원이야?
세미 정장 차림의 여직원은 응,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남일이 아니구나 정말.
진찰받을 때마다... 끔찍해. 어떻게 산부인과 의사란 사람이.
그녀는 끔찍한 상상을 짜내듯 목과 어깨를 꾹꾹 눌렀다.
그 병원, 절반 이상은 병원장 손님이었을 걸?
희진이 근무하던 병원의 폐업 소식은 얼마간 지역 신문을 떠돌았다. 우진은 귀가한 뒤 공연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얼마 전 가입한 맘카페 화면이 메인에 떠 있었다.
자기도 들었어?
뭘?
병원 말야. 결국 문 닫았대.
아.
연령은 냄비 뚜껑을 열고 감자를 젓가락으로 찔러볼 뿐이었다.
그나저나 사람들 참 할 일 없어. 그치?
그러게.
연령은 건조하게 답했다.
우진 씨. 이리 와서 간 좀 볼래?
며칠 뒤 우진이 퇴근했을 때 집은 불이 꺼져 있었다. 통화 버튼을 서른 번째 누르던 우진은 전화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말았다. 연령은 새벽 두 시쯤 집에 들어왔다. 우진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쏘아붙이듯 물었다.
전화는 왜 안 받아?
미안.
우진은 이마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워졌다.
희진 씨한테 갔던 거지?
연령은 고개를 저었다.
밥은?
연령은 또 고개를 저었다. 우진은 그녀를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연령은 그대로 침대에 엎드렸다.
조금만 쉴게.
머뭇거리던 빛줄기가 가늘어지다가 소멸됐다. 연령은 천천히 돌아누웠다. 천정을 보다가 빛이 마지막까지 머물던 방향을 보았다. 갑자기 사라진 희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뭘까? 갑자기 두통이 치밀며 배가 아파왔다. 연령은 누운 채로 새우처럼 허리를 굽혔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연령은 이를 악물었다. 입술에서 또 피맛이 났다.
우진은 진동이 울리는 휴대전화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연령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연한 녹색 원피스 차림에 어깨를 웅크린 모습이었다. 삼 년 전 태안 바닷가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연령의 스카프가 바람에 날아갔고 우진은 호기롭게 그것을 줍겠다며 나섰다. 그의 손이 스카프에 닿으려던 찰나, 우진은 균형을 잃고 바다에 떨어졌다. 물에 빠진 생쥐꼴로 걸어 나온 우진의 손에는 훈장처럼 연령의 라임색 스카프가 쥐어져 있었다.
연령은 원피스 자락을 한쪽으로 모은채 우진에게 손을 뻗었다. 우진은 그녀의 손을 잡는 대신 휴대 전화를 꺼냈다. 연령은 감기 든다고 어서 나오라고 재촉하면서도 우진에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바람이 거셌고, 우진의 손은 쉴 새 없이 떨렸다. 초점이 흐린 사진 속 연령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고 있었다. 우진은 뜻 없이 그 사진들을 넘겨보곤 했다. 오래되지 않은 시간들인데도 유독 멀게 느껴졌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미소, 그날의 바람. 한기와 물이 뚝뚝 떨어지던 스카프. 원피스가 바람에 펄럭이던 소리.
그때는 저렇게 자주 웃었었는데.
전화를 받은 우진은 지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이중 주차해 둔 차가 빠지는 동안 우진은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연령은 받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묘하고 이상한 냄새가 났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식탁 아래 스티로폼 상자가 보였다. 연령은 창가 쪽에 바싹 붙은 채로 우진을 불렀다. 우진은 물기를 피해 그녀에게로 갔다. 연령은 스티로폼 상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부터 좀...
뭔데 저게?
연령은 입을 가리며 도리질을 했다.
상자는 묵직했다. 우진이 상자를 힘주어 들자 뚜껑이 열리며 안에 든 것들이 쏟아졌다. 시커멓고 미끈한 덩어리가 툭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다. 우진은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연령은 헛구역질을 했다. 얼음덩어리처럼 보이는 그것은 묘한 인상을 주었다. 쪼개진 틈에서 검붉은 액체가 배어났다. 께름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고 조금씩 다가가 정체를 살피던 우진이 다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그것을 보며 연령은 희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피가 마를 때 나는 냄새라고 했던가. 미칠듯한 이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요즘 들어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진이 입가를 닦으며 물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는 한참을 토한 듯 안색이 거뭇거뭇해져 있었다.
모르겠어. 문 앞에 있어서 들여놨는데...
우진은 놀람이 가시지 않은 눈으로 얼음덩어리를 흘끗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죽은 고양이 같은데.
우진은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청소용 고무장갑을 덧끼웠다. 연령이 시선은 반대로 한 채로 검은색 비닐을 벌려 주었고 우진은 흐물거리는 고양이 시체를 그 안에 담았다. 우진은 봉지를 꼭 묶어 두터운 비닐 안에 한번 더 넣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우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다. 흙탕물을 밟고 논 것처럼 검은 자국이 전신에 튀어 있었고 볼과 목은 실핏줄이 터진 듯 울긋불긋했다. 아파트 입구를 나온 다음 우진은 화단으로 향했다. 그는 주변을 한차례 둘러보고는 검은색 봉지를 조심스레 열어 화단에 쏟았다. 우진은 숨을 참으며 나뭇가지로 그것을 헤집었다.
아파트 아래에는 허리 정도 높이쯤 되는 어둑어둑한 공간이 있었다. 거기에서 눈빛 하나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우진은 며칠 전 하악질 하던 고양이를 떠올렸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구석으로 던졌다. 우진은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결혼하면서 담배를 끊은 후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우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아무래도 휴가를 내야 할 것 같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