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막-3>
연령은 마음이 조급해지는 걸 느꼈다. 희진에게 나쁜 일이 일어난다면 모두 자기 탓일 것만 같았다. 무성의한 방관과 방치가 한 사람을 동강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용기 내지 못한 자신이 미웠다. 우진은 그런 마음을 용기가 아니라 오지랖이나 만용으로 치부하겠지만. 부부도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건 분명히 있다고, 연령은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실망하지 말자. 실망하지 말자.
아직은 괜찮다. 괜찮다.
우진이 액셀에 힘을 실었고, 차는 밤길을 거칠게 튀어나갔다. 가로수가 하나의 선으로 이어졌다. 우진이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우진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그런 행동을 했다. 연령은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연령은 이유도 모른 채 화가 났다. 그 화가 우진을 향하는 것을 연령은 내버려 두었다. 내가 화내는 건 당연해. 내면을 떠돌던 목소리의 일부가 말릴 틈도 없이 터져 나왔다.
잔소리할 거면 돌아가.
우진은 말없이 창문을 내렸다. 바람이 갈라지는 소리가 연령의 귀를 먹먹하게 했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자동차는 가끔 심하게 덜컹거렸다. 연령은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잠시 후 연령이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가로등 빛이 드문드문 바닥을 비추는 오래된 아파트였다. 희진을 닦달해 주소만 받아 두었을 뿐 직접 온 건 연령도 처음이었다. 언니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야,라고 연령은 생각했다. 아파트 벽면의 균열이 눈에 띄었다. 우진이 주차할 자리를 찾고 있을 때 연령은 이미 차에서 내려 달리고 있었다.
아이를 가진 후로 연령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가 어지러울까 봐 겁났다. 연령은 어릴 때부터 멀미가 심했다. 자라면서 나아졌지만 여전히 흔들리는 건 질색이었다. 평탄한 길만 골라 걸었고 해가 들지 않는 곳은 피했다. 앉아 있을 때도 자세를 바로 하려고 애썼다. 아이를 가진 지난 5개월, 연령은 그런 노력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바람을 밀어내듯 달리는 동안, 연령은 자신을 가두고 있던 족쇄가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우진은 연령이 달리는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그녀는 빠르고 날렵했다. 마치 발이 공중에 뜬 사람처럼. 차를 아무렇게나 대고 연령을 뒤쫓았다. 연령은 엘리베이터 층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연령은 엘리베이터가 유난히 천천히 돌아온다고 생각했다. 우진의 가쁜 숨소리와 대조적으로 연령의 호흡은 차분했다. 아파트 내부는 한기가 짙었다. 엘리베이터 안은 더욱 그랬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연령은 철문을 두드렸고 우진은 망설이다 초인종을 눌렀다. 연령이 휴대전화를 뒤적여 희진의 도어록 번호를 찾아냈다. 디지털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연령은 거실과 부엌을 눈으로 훑은 뒤 방으로 달려갔다. 방은 잠겨 있었다.
언니! 나 령이야.
연령이 방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우진이 힘주어 문고리를 당겼다. 연령은 식탁 의자를 집어 들었다. 우진이 짜증스러운 신음을 뱉으며 연령에게서 의자를 뺏았다.
어쩌려고!
놔!
연령이 온 힘으로 우진을 밀친 뒤 어깨로 문에 부딪혔다. 쾅. 쾅. 처음 들어보는 거친 소리가 우진을 얼어붙게 했다. 연령이 어깨를 잡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섰다.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아는 욕설 몇 개가 마구 뒤섞여 나왔다. 우진은 의자를 들어 문을 내리쳤다. 몇 번을 내리치자 문고리가 빠지기 직전의 유치처럼 너덜거렸다. 우진은 문을 발로 찼다. 화가 머리끝까지 날 것 같았다. 마침내 열린 문을 밀치며 연령이 쓰러지듯 희진에게로 달려가 안겼다. 희진은 바닥에 몸을 구부린 채 쓰러져 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주는 알약과 플라스틱 통이 그녀의 머리 주변을 나뒹굴었고 입에서 흘러나온 불투명하고 끈적한 액체가 피를 토한 것처럼 바닥에 고여 있었다. 연령이 희진을 흔들며 소리쳤다.
언니! 정신 차려 봐! 언니!
우진은 덜덜 떨리는 손을 힘주어 만졌다. 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
희진이 정신을 차린 건 응급실에 도착한 지 두 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불빛이 희진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익숙한 소독약 냄새가 났고 희진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디선가 연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들어, 언니?
그녀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희진은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깨어나셨어?
조금 멀리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피곤하고 무거웠다. 희진은 눈을 감고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해야 할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우진이 돌아서는 모습만큼은 이상하게도 눈에 명확이 보였다. 희진은 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녀의 어깨에 진동이 일었다. 연령은 담요를 덮어주었다.
네가 왜.
언니가 전화했잖아.
내가 그랬지. 바보같이.
고마워.
뭐가?
나한테 전화해 줘서.
우진은 가슴이 답답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도 손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연령은 문에 부딪힌 오른팔을 들 수도 없을 만큼 부상이 심했다.
연령은 희진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우진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밤그늘이 짙게 깔린 곳에서 우진은 다급히 웅크렸다. 입이 지독하게 썼다. 우진은 한참을 게워내다가 입가를 훔쳤다. 그리고 생각했다. 할 수만 있다면 오늘 있었던 일들을 모두 토해내고 싶다고. 연령이 우진의 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
병원에서 알아서 하겠지. 가자. 이만하면 됐어.
연령은 대답하지 않고 돌아섰다. 우진이 연령의 오른쪽 손목을 낚아챘다. 연령은 낮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우진이 깜짝 놀라 손을 놓았다. 연령은 고통을 참는 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그녀는 서늘한 빛으로 우진을 노려본다. 그녀의 눈에서는 이미 여러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다.
알고 있었어.
나도 알아. 자기가 최선을 다한 거.
우진이 연령을 당겨 품에 안으려 했다. 그녀의 어깨가 또다시 파르르 떨렸다. 우진은 그것을 고스란히 느꼈다.
알겠으니까 병원부터 옮기자. 아이 생각해야지. 응?
연령은 갑자기 정신이 말끔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고요히 몸을 돌렸다. 연령은 지금껏 삶을 구성해 온 모든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우진을 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비참해질 것 같았다. 연령은 뿌리가 썩은 식물을 떠올렸다. 아프지 않고 메말라가던 나무를 떠올렸다.
알았으니까 먼저 가.
연령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