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막-2>
그 후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른다. 희진이 몇 마디를 더 했고 연령은 귀 기울였지만 글자는 귓바퀴만 맴돌다 툭툭 떨어져 나갔다. 파스타와 돈가스를 대부분 남겨둔 채로 두 사람은 식당을 나왔다. 자꾸 웃는 희진이 연령은 미웠다. 하지만 자신이 화를 내도 바뀔 것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고 그 생각 때문에 연령은 머리가 더 아팠다. 함께 병원으로 가는 동안 희진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다가 헤어졌고 희진은 간호사실로 연령은 진료실로 각각 들어갔다. 그날따라 원장은 보이지 않았다. 희진이 단단히 주의를 주었기에 연령은 발작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진료를 받는 내내 앞에 앉은 의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의사는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다 말을 아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멀었다. 연령은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발이 아팠고 공연히 짜증이 났다. 커피를 한잔 타서 앉았고 그 커피가 완전히 식을 때까지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러다 해가 질 때쯤 우진이 귀가했다.
또 커피 마셨어?
우진은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임신한 동안만 좀 참으라니까.
연령은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왜? 병원에서 뭐라고 해?
아니. 그냥. 좀 피곤해서.
우진은 이미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그가 돌아 나와 화장실로 가고 씻는 동안 연령은 저녁 준비를 했다. 우진은 머리를 털며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봤다.
된장찌개 냄새 좋다.
우진이 다가와 과장되게 냄새 맡는 시늉을 했다. 그가 뒤에서 연령을 안으며 배를 살짝 어루만졌다. 아직은 그 속에 생명체가 들어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잘 크고 있대?
응.
그러면서도 연령은 슬쩍 우진의 팔을 밀어냈다.
사실 배가 조금 아파.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그것을 끝으로 우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배가 조금 아파. 그 말의 진위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된장찌개를 사이에 두고 앉으며 우진은 허겁지겁 밥을 삼켰고 연령은 밥알 몇 개를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우진이 지나가듯 말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고. 그래도 밥은 먹자.
연령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대화가 없는 식사는 빨리 끝났다. 우진은 잠시 기다리다가 설거지를 하러 갔다. 물소리가 조르륵 들리며 그릇들이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연령이 우두커니 식탁을 보며 말했다.
내가 희진 언니 얘기 했던가?
요 근처 병원에 다닌다는 분?
기다렸다는 듯 우진의 대답이 이어졌다.
응.
거기서 대화는 다시 끊어졌다. 연령은 그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을 알았다. 우진은 자신의 삶 이외에는 관심을 극도로 아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물어왔다.
희진 씨가 왜?
언니가 병원에서 나쁜 일을 당한 것 같아.
그래?
우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예전에도 그랬다. 우진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대화를 피했다. 연령은 그런 그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우진이 가진 좁은 경계 속에 자신만 들어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답답하게 느껴졌다.
우진은 설거지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갔다. 건조대 위에 그릇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문득 긴 한숨이 틈 없이 닫힌 방문을 타고 전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우진은 연령의 앞에 다시 앉았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가해자는 누군데?
병원장.
그 말을 들은 우진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병원장.
우진은 같은 말을 조용히 되뇠다.
우진은 벽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에는 반짝거리는 새 액자가 걸려 있었다. 우진의 만류에도 걸어둔 하나 남은 가족사진이었다. 우진은 그 사진을 버리려고 했고 실제로도 버렸다. 그러나 연령은 구겨진 사진을 곱게 다린 다음 사진관을 다녀왔고, 돌아온 그녀의 옆구리에는 큼지막한 액자가 끼워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고 싶어서 그런 거야.
우진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연령은 사다리를 세우고 연장통을 가져왔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령은 딱지 가방을 꼭 붙들고 다니는 아이처럼 액자를 몸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남은 한 손으로 끙끙거리는 연령을 보며 우진은 연장통에서 망치와 못을 꺼내 벽에 박았다. 그리고 망설이는 연령에게서 액자를 건네받아 벽에 걸었다. 하지만 끝까지 사진 속 얼굴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연령은 무언가에 꽂히면 말릴 틈이 없었고, 우진은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연령의 고집을 꺾으려다가는 자신이 먼저 꺾이고 말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연애 중에도 종종 연령과 싸웠지만 그녀에게 결국 지는 것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맹랑한 기백이 어처구니없으면서도 상큼하게 느껴졌다. 싸움에서 진 것과는 달랐다. 우진은 희미하게나마 그런 느낌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다. 저 액자도 비슷했다. 막상 걸어두고 보니 연령의 말대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우진은 연령의 저런 철없는 행동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두 개의 답답함이 마주치자 모래알 같은 갈증이 몰려왔다. 우진은 머그잔에 담긴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켰다.
여보.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연령은 귀를 막고 싶었다.
당신 임신 중인 거 알지?
연령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어.
우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우진의 손목을 잡았다.
그래도...
우리가 도울 방법은 없어.
우진을 붙든 연령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우진은 그 자리에 있었고 연령이 순식간에 일어나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우진은 공간을 힘없이 응시하다가 소파로 갔다. 명치가 답답했다. 급히 삼킨 밥이 채한 것 같았다. 이미 넘치기 직전이었다. 우진은 진통제 한 알을 털어 넣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켰고 잘 정돈된 목소리의 뉴스 앵커가 세상의 소식을 전했다. 모든 것들이 공허하게 들렸다.
새벽 시간, 굵직한 진동이 연령의 고막을 두드린다. 연령은 눈을 비비며 침대를 더듬었다. 그녀는 휴대 전화를 들고 거실로 나갔다. 소곤대는듯한 연령의 목소리가 화살처럼 날아와 우진의 귀에 꽂힌다.
언니. 왜 그래? 아냐. 지금 갈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응? 조금만 기다려. 알았지?
안방 문이 살짝 열리며 가는 빛줄기가 우진의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령은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겨 다시 나가고 있었다. 우진이 혼곤하지만 분명하게 물었다.
희진 씨한테 가는 거야?
연령이 망설이다 작게 대답했다.
응. 언니가… 자세한 얘긴 이따 할게.
같이 가.
우진이 이견 따윈 용납하지 않는다는 몸짓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바지를 당겨 입었다. 연령은 그 모습을 초조하게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른 입술에서 피맛이 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