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https://brunch.co.kr/@highting1/598
77.
거기도 똑같은 사람이 살고 있을 뿐이라고, 나는 여러 번 생각했다. 회관 입구에서 안내 완장을 차고 차례차례 소집되는 예비군 복장을 한 사람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중위와 상사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바닥의 화살표를 따라, 때로는 군인들의 손짓과 안내를 따라, 벽에 붙은 종이에 쓰인 글씨를 따라 나는 이동했다. 인도 인접 장소에는 입사 면접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책상이 가로로 쭉 늘어져 있었다. 책상에 앉은 단정한 복장의 실무자들은 명부를 앞에 펼친 채 이제 막 입구로 들어선 나를 기계적으로 쳐다보았다. 그들의 관심사는 줄줄이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투복 상의에 가 있었다. 눈이 좋은 사람들은 이미 대강의 명찰 실루엣 만으로도 자기들이 체크할 대상이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머뭇거리는 내게 비슷한 생김새와 복장을 했으나 조금은 어려 보이는 여자가 내게 다가와서 어디 소속이세요? 하고 물었다. 나는 함대 인사참모실요,라고 작게 대답했다. 그녀가 저기로 가시면 된다고 말하며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함대 인사참모실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하얀 셔츠 차림에 파마머리를 뒤로 묶은 여성이 앞에 놓인 명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내게 말했다. 신분증 주시겠어요? 나는 운전면허증을 내밀었다. 이름이 신영우 맞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년월일이 1985년 2월 6일이시고요.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손은 민활하게 움직이며 명단이 빽빽하게 쓰인 종이들을 넘겼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하나의 이름 앞에 멈췄다. 그녀는 내 이름 옆의 공란에 체크하면서 문진표를 내밀었다.
저쪽에서 작성하신 다음에 군의관님께 상담받으세요,
그녀가 가리킨 쪽의 원형 탁자에는 나와 비슷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둘러앉아 펜으로 무언가를 부지런히 작성하고 있었다. 나는 빈자리에 앉으려다가 우선 군의관에게로 갔다. 소령 계급장을 단 군의관은 다가오는 나를 의아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문진표 다 작성하셨어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뜨거운 바람이 불어온다는 걸 나는 알았다. 어떻게 하면 너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기억할 수 있을까. 벌써 8년도 더 된 일이었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날따라 나는 출근이 더딘 너를 기다리며 회의 자료를 준비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같은 번호로 반복되는 발신전화 목록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출력물을 정리하는 동안 저쪽 칸막이 너머에서는 야, 아직 다 안 됐냐 하는 선임참모의 목소리가 앵무새처럼 반복됐다.
그는 슬리퍼를 직직 끌며 다가와 바인딩기와 씨름 중인 내 앞에 섰다.
그러게 전날 좀 해놓으라니까. 이것들은 말을 해도. 어휴.
그는 왼쪽 겨드랑이에 수첩을 낀 채로 내쪽을 노려봤다. 시계가 걸린 벽을 흘끗 돌아본 다음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짝다리를 짚고 선 채 오른쪽 다리를 발작적으로 떨었다.
나는 초조한 눈으로 모니터 화면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마우스는 자꾸만 손에서 미끄러졌다. 뒤이어 출력되는 종이에 밀려 바닥에 떨어지는 낱장들을 급히 주워 순서에 맞게 끼워 넣으며 정해진 줄을 형광팬으로 긋고 플래그잇을 붙였다. 그러다 간혹 이상한 소음을 내며 멈춰서는 프린터를 두드렸다. 용지를 채워 넣고 두장이 밀려 출력된 페이지를 찾아 다시 프린트 버튼을 눌렀다.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내가 그러는 동안, 선임참모는 한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대략 3초에 한 번씩 쯧,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나저나 얘는 어떻게 된 거야. 왜 안 온대? 전화 안 받아?
나는 묵묵히 표지를 찾아 꽂으며 네. 전화를 안 받습니다, 하고 말했다. 내가 탁탁 치며 몇 개의 회의안건을 가지런하게 정리하는 동안 그는 참지 못하고 내 손에 든 종이뭉치를 낚아채 갔다.
이 새끼, 이번엔 각오하라 그래.
선임참모가 씹어 뱉듯이 그 말을 내뱉는데 저쪽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그는 에이씨, 하며 자료를 대충 뒤적이다가 전대장실로 달려갔다. 그러다 다시 슬리퍼를 직직 끌고 자기 자리로 가서 단화로 갈아 신었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으로 몇 번 쓸고 넥타이를 고쳐 맨 후에 흠흠 하며 목을 가다듬고는 전대장실 문 앞에 서서 휴 하고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전대장님, 선임참몹니다.
그가 문을 두드리며 말하자 안에서 들어와, 하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들렸다. 탁 하고 문이 닫히며 그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비로소 숨을 골랐다. 시계를 보니 이제 막 일곱 시 십오 분을 지나고 있었다.
출근과 퇴근을 가늠할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예하에 잠수함 3척을 거느린 전대본부에는 장교 셋과 부사관 셋이 근무하고 있었다. 전대장, 선임참모, 그리고 작전관인 나와, 행정장, 갑판장, 주임원사였다. 거기에 전대장 당번병까지 일곱이 전부였다. 직제 상으로는 몇 명이 더 있어야 했으나 대부분 공석이었다. 공석인 기간이 너무 길어서 이제는 거의 공식화된 구성이었다. 가끔 새로운 사람들이 얼굴을 비추긴 했다. 함정 부적응자로 배에서 내린 인원들이 새 근무지를 찾을 때까지 전대에 머물렀다. 그 기간은 며칠이 되기도 했고 때로는 몇 달이 되기도 했다. 그중 가장 길었던 건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동그란 하사였는데 받으려 하는 부대가 없어서 내가 부임했을 때 이미 전대에 파견된 기간이 일 년이 넘은 상태였다. 그는 나보다도 전대가 돌아가는 사정을 더 잘 알고 있었는데 부임 초기에는 슬슬 웃으며 내게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알려주기도 했으나 순 엉터리라는 걸 들킨 뒤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슬슬 피해 다녔다.
(계속)
https://brunch.co.kr/@highting1/462
https://brunch.co.kr/magazine/shortest-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