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76.
길을 잃은 느낌이었어. 발버둥 쳤지만 실은 엉뚱한 길로 내내 걷고 있었던 거야. 저 살길도 막막한 아이가 다른 생명을 떠안겠다는 게 사람들 눈에는 흥미로워 보였을 거야. 내력이 궁금하면서도 예쁜 꿈을 짓밟고 싶지는 않았겠지. 적당히 응원하고 손뼉 치는 마음. 하지만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싶지는 않은 마음. 웃으며 맞장구칠 수 있는 거리. 불이 아름답지만 뜨겁지는 않을 거리.
피곤하니까, 그런 사람. 스스로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을 벌여서 그 여파는 고스란히 주변사람의 몫으로 돌아오게 만들게 뻔하니까.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있다고 믿는 건 어린아이의 전유물은 아냐. 그런 치기가 평생 가는 사람도 있어. 사춘기가 사람마다 다른 것처럼 튀어나온 못은 구부러지거나 깎여 나가기도 하지만 다가오는 사람을 무신경하게 찔러대기도 하니까. 너라면 고슴도치처럼 가시가 돋아난 사람 곁에서 살 수 있어? 오래도록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어?
그러니까 참 묘한 시선이었어. 혼자라는 게 뼈에 사무칠 만큼. 사람들의 눈은 따뜻하고 온화하고, 또 멀어 보였어. 그런 눈을 보면 오히려 내 처지를 더 확실히 알게 돼. 나름 따뜻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나와 이 고양이를 가족으로 받아줄 사람은 없다는 거니까. 불쌍해하는 것과 사랑하는 건 달라.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그걸 뜻 없이 구분할 수 있게 돼. 하고 싶지 않아도 분명하게 가늠하게 돼. 조금만 기울어져도 어지럼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내가 그들과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소스라치듯 정확하게 알게 되는 거야.
그거 알아? 우주는 지금도 팽창하고 있대. 항성과 항성, 은하와 은하 사이의 거리는 지금도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있어서 어떤 별들은 평생을 기다려도 절대로 볼 수 없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밤하늘의 별들은 점점 더 줄어들 거래. 어쩌면 지금 보이는 별들도 이미 죽은 별의 흔적일 수도 있대. 우린 그러니까 머나먼 과거의 빛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엄마가 생각나. 만약 엄마가 거기 있다면, 머리 위에 뜬 수많은 별들 중 하나에 서 있다면, 그곳의 엄마는 아직 살아있을 수도 있잖아? 그럼 내가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별을 향해 날아간다면 엄마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알아. 이런 것들이 과거에 얽매인 삶의 방식이란 걸. 하지만 이런 방식이 아니면 엄마를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걸. 누구는 집에만 가도 볼 수 있는 엄마를 나는 절대로 만날 수 없는 걸. 그래서 차라리 너무 먼 곳에 있어서 ‘지금은’ 만날 수 없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세상은 변하니까. 저 머리 좋고 난다 긴다 하는 분들이 인간의 영역을 수없이 넓혀나가고 있으니까. 왜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단지 지구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엄마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너무 먼 일이라서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내가 알지 못하는 공간에서도 무언가 사건은 일어나고 있다면, 하고 지금을 부정해 보는 거야. 무심하지만 간절하게.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글쎄. 그런 걸 절망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고통도 오래 가면 무감각해진다잖아. 받아들이면 덜 힘들어진다고도 하고. 그때 나는 익숙해져 있었어. 그런 식의 이별이나 거리감, 멀어짐 같은 것들에. 온기가 두려워질 때가 있잖아. 한번 묻었다 사라질 온기라면 처음부터 익숙해지지 않는 게 낫다고. 내내 손이 차갑던 사람은, 내내 혼자였던 사람은. 그게 상수나 관성이었던 사람은 갑작스러운 변화가 두려운 거야. 그래서 나를 끌어당기려는 것들로부터 무의식적으로 달아나려고 해. 아무 일도 없으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테니까. 적어도 지금보다 더 서글퍼지지는 않을 테니까.
**
골목은 정말 좁았어. 1톤 트럭의 양 끝이 아슬아슬하게 담벼락 사이를 통과하는 모습을 나는 도저히 지켜보고 있을 수 없었어. 그런데 눈을 감으니까 더 무서워지는 거 있지? 나도 모르게 실눈을 떴는데 새끼손가락 하나 들어갈까 싶은 공간을 남겨두고 하얀색 트럭이 골목으로 유유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어. 어쩐지 꿈같았어. 그 이후로 펼쳐진 모습도 그랬지만.
아저씨 두 분이 피아노를 분해하기 시작했어.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는 방에서 꺼내는 것부터가 일이었어. 창문도 크지 않아서 결국 방과 거실, 현관을 지나 담 위로 넘겨서 트럭에 실었지. 분해되어 차곡차곡 트럭에 쌓여가는 모습이 아파 보였어. 몸의 절반이 너덜거리던 그 고양이 같달까. 그 고양이, 결국 도망쳐버린 거 알아? 성당으로 데려갔던 날, 어쩐 일인지 케이지가 열려 있었고 빈 사료통만 굴러다녔어. 며칠 뒤에 비슷한 녀석이 동네를 돌아다니는 걸 봤는데, 그 녀석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피아노는 그렇게 성당으로 온 거야. 나도 그 집을 떠나 여기 살게 됐지. 신부님과 수녀님이 작은 방을 만들어주셨어. 벌써 5년 전 일이야. 나쁘지 않아. 그리 좋지도 않지만. 성모마리아상을 마주 보고 있으면 마음이 푸근해지기도 하고. 그 집을 어떻게 할 건지도 물어보셨는데 얼버무리고 말았어. 그래도 없으면 안 될 것 같달까. 혹 여기서 다시 버림받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나님이라고 날 꼭 버리지 않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대충 믿는 척하고는 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어. 하지만 여기 말고도 내가 모르는 세상이 있다는 걸, 죽은 후에나 갈 수 있는 데가 따로 있다는 걸 믿어보고 싶어. 그럼 엄마랑 아빠도 분명 거기 있을 테니까.
**
오후 세 시. 카페 문이 열리고 하늘색 니트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깡마른 몸매의 여자가 들어왔다. 흔치 않은 일이다. 이 시간에 손님이 온다는 건. 그 여자는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쇼케이스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거 파는 거예요?
나는 그녀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유심히 쫓아간 끝에 그녀가 묻는 것이 탄산수라는 것을 알았다.
판매하는 건 아니고요. 에이드 만들 때 쓰는 거예요.
물 아니에요?
탄산수예요.
탄산수? 사이다 같은 거예요?
여자는 좁쌀만 한 눈을 치켜떴다. 습관적으로 안경 오른쪽을 들었다 내리는 모양새가 새 안경을 맞춘 지 얼마 안 된 사람 같았다.
네.
그래서 한 병에 얼마예요?
파는 게 아니라고요.
파는 게 아니라고요?
네. 에이드 종류 만들 때 저희가 쓰는 거라고요.
에이드? 아, 에이드으...
여자는 입을 오물거리며 말을 끌었다. 나는 마냥 낯설지 않은 그녀를 보며 기억을 되감았다. 세 시간쯤 전에 카페 앞에 차를 대고 사라진 사람이 있었는데 그때 지나친 여자 같았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거릴 때마다 왼쪽 입술 위의 점이 같은 주기로 움직였다.
손님분들이 커피는 안 드신다고 해서, 그럼 하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여자는 안타깝다는 듯이 카페를 한 바퀴 휙 둘러보다가 들어올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돌아나갔다. 나는 에이드도 탄산음료고 커피는 아니라고 그녀에게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뒀다. 여자가 나간 후에도 차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밖은 32도였다. 올 봄 들어 가장 뜨거운 날씨였다. 구름 없이 맑은 하늘이기도 했는데 볕이 유난히 따가운 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찬물을 뒤집어써도 몸이 식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물기는 금세 말랐고, 먼저 마른자리를 중심으로 잠시 수그러들었던 열기가 보란 듯이 샘솟았다.
달력을 보니 화요일이었다. 화요일은 화분에 물을 주는 날이었다. 화요일의 화가 그 화자는 아니었지만 화요일은 화분에 물 주는 날, 하면 기억하기 쉬워서 좋았다. 보통은 카운터 바로 앞의 고무나무부터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물을 주었다. 그런데 오늘은 밖에 내어둔 작은 화분들에 유난히 눈에 밟혔다. 카페가 달궈진 쇳덩이 위에 올려진 것 같아서 그런지 화분들도 그래 보이는 것 같았다.
오전에 뿌려준 물은 이미 흔적도 없이 말라 있었다. 손가락을 흙 속으로 찔러보았다. 하얗게 탄 숯가루 같은 먼지가 묻어 나왔다. 요일에 불화자가 붙은 날이라서 그런가. 내가 커다란 불덩이 주위에 기생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인가. 아주 작정한 듯 태양이 자신의 정체성을 뽐내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태양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틀었다. 잠깐 마주쳤을 뿐인데 눈앞에 큰 점 하나가 떠다니는 게 보였다. 바다에 뜬 기름기처럼 그 원은 테두리가 여러 색으로 변했다. 눈을 비벼도 사라지지 않았고 내가 바라보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자기 크기만 한 공간을 덮었다. 그러나 가려진 느낌이라기보다는 세상의 그만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타들어간 쪽은 오른쪽인 모양이었다. 왼쪽과 오른쪽 눈을 교대로 깜빡여 보는데 오른쪽 눈을 감으면 없어졌던 세상이 다시 나타났다. 재미 삼아 몇 번 해보다가 어지러워져서 그만뒀다. 밖에서 실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그러고 있는데 저쪽 편의점에서 아까 그 여자가 페트병 몇 개를 손에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차에 올랐다. 선팅이 진해서 그런지 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차 운전석쯤을 한동안 쳐다보다가 화분에 물을 주었다.
거기는 아마 화덕처럼 달궈졌을 텐데.
여자는 창문을 열지 않았다. 차는 공회전을 하며 이십 분가량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 빠진 자리로 흰색 승합차 한 대가 들어왔다. 여섯 명이 우르르 내려 카페로 들어왔다. 주문을 마친 그들은 반팔 상의를 들었다 내렸다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잔에 얼음을 담다 말고 에어컨을 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