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해 여름

그해 여름(80)

80.

by 작가 전우형

80.

물보라가 심하게 이는 새벽이었다. 나는 얼굴을 무릎에 묻은 채로 바짓단이 끌리는듯한 포말을 귀에 담고 있었다. 그러다 눈동자를 빛이 거의 새어 들어오지 않는 창가 쪽으로 틀었다. 살갗과 살갗 사이의 좁은 틈으로 두 사람이 팔을 뻗어도 남을 투명한 유리창을 보았다. 밖은 아직 어두웠다. 어쩌면 지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저렇지 않을까 싶은 그런 색깔이었다. 그 아이도 나와 같은 하늘을 보고 있을까.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있을까. 그 또렷하고 깊었던 눈동자로. 내게 말을 걸어오던 짙은 갈색의 눈동자로.


밀도 짙은 어둠이 시야를 먹먹하게 내리눌렀다. 검은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유채색이 섞이고 섞이어 마침내 검어진 것처럼, 그 색의 유화물감으로 세상을 온통 칠한 것처럼, 몇 걸음 앞도 볼 수 없었다. 오로지 한 치 앞만을 응시하도록 강요하는 괴괴한 어둠 앞에서 나는 들려오는 소리들로부터 눈을 감았다. 마치 그렇게라도 눈을 감으면 세상과 내가 분리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나 지독한 불면이었다. 눈 감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팔레트 안이 선홍의 물감들로 채워져 갔다.


충혈되어 빨갛게 부푼 눈을, 자꾸 물기가 어려 흐려지는 눈을, 힘들여 어딘가를 바라보려 하는 눈동자를, 덩굴장미처럼 뻗은 빨간 줄기들이 도드라진 흰자위를, 나를 건너다보다가 힘없이 내려뜨려지는 눈을, 세면대 앞에서 나는 바라본다. 그날의 너를 보듯 나는 물러선다. 네게 다가가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선다.


유리 위로 일그러지는 풍경이 말해주었다.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세상이 무언가에 적셔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자주 되뇌었다.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에 맞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에 맞춰, 눈을 감았다가 뜨는 순간에 맞춰, 비가 속이 빈 쇳덩이를 두드리는 소리에 맞춰. 나는 되뇌었다. 잊고 싶다고, 잊게 해달라고.


**


승조원 사무실은 정사각형 건물의 면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었다. 1층의 한 면은 창고로 사용했다. 대개 불이 꺼져 있었고 창은 나무판 같은 것으로 덮어 있어 안이 보이지 않았다. 복도 높은 곳의 불투명 유리 너머로 어지러이 쌓인 물건들의 실루엣이 희미한 빛에 비쳐 짙은 회색의 그림자를 드리울 뿐이었다.


2층부터가 본격적인 사무실 구역이었다. 층마다 4개의 승조원 사무실이 빙 둘러 자리 잡은 구조였다. 가운데는 정원 겸 휴식터가 마련돼 있었고, 그 둘레를 정사각형 건물이 성벽처럼 감싼 형태였다. 정원 가운데에는 서너 사람이 누울만한 너비의 정자와 음료수 자판기가 있었고, 한쪽 가장자리로 흡연구역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거기 몇 사람이 벽에 기대거나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뻗어 나온 하얀 연기가 바람에 쓸려 날아가며 점차 투명해졌다.


복도의 초입에는 함명의 유래를 소개하는 홍보물과 함 마크가 전시돼 있었다. 함별로 복도 하나씩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무실을 찾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은 편이었다. 하지만 스무 척 가까이 되는 사무실의 위치를 모두 기억해야 할 이유도 없어서 거기를 출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장 빠른 루트를 정해놓고 그 길을 따라서만 다녔다.


승조원 사무실은 함장실, 사관실, 행정실, 승조원사무실, 그리고 교육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공간 자체는 제법 넉넉했지만 비어있는 사무실이 많았다. 승조원들은 한해의 삼분의 이를 바다에 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수리나 검열, 재박훈련 등의 일부 기간을 제외하면 사무실은 상수처럼 굳게 잠긴 채 불이 꺼져 있었다. 영현이는 자신이 근무했던 사무실 앞을 지나며 조직도를 훑어보았다. 거기에는 아직도 그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영현이가 근무했던 잠수함은 장보고급이었다. 우리 전대는 장보고급보다 무게가 6백 톤 정도 더 나가는 손원일급 잠수함 3척을 지휘하고 있었다. 장보고급은 2급함이고 손원일급은 1급함이었다. 함장의 계급도 중령과 대령으로 달랐다. 부서장의 평균 계급은 소령이었다. 전대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나로서는 예하함 장교들의 계급이 더 높은 것이 달갑지 않았다. 언제고 다른 근무지에서 직속상관으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 당연히 요구해야 할 것들도 요구하기가 어려웠다. 이제 대위에 오르는 영현이에게는 그런 부담이 더 크게 다가올 수 있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이고, 비협조적으로 나와도 일단은 기다려주라고,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받아야 할 것들을 받는 게 중요하다는 말에 영현이는 조금 긴장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선임참모는 말이 거친 사람이니, 한마디 한마디를 너무 새겨듣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선임참모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름도 천억이었다. 성이 육씨라서 육천억. 무슨 이유로 그런 이름을 지어주셨는지는 모르나 바람처럼 그는 육천억짜리 배의 함장을 해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것이 지난 시절 놀림받은 세월에 대한 보상이라며, 그는 묻지도 않은 과거사를 술자리 레퍼토리처럼 늘어놓곤 했다. 그 레퍼토리의 반복은 진급심사에서 한번 미끄러진 뒤에 더 심해졌다. 다들 될 거라고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안 됐다. 전대장도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어서 작년은 지금보다 더 어려웠다고, 얼굴이 검고 이마가 넓은 행정장이 말해 주었다.


그래도 전대장님은 장성 진급하시가, 전단장으로 가셨는데예. 참모만 꼴이 우습게 됐지예. 그 사람 말만 믿고 드러븐 꼴 보든 말든 시키는 거는 다 했다 아입니꺼. 맨날 심부름 다니고, 행사랑 선물 챙기고, 뭐, 물론 그것도 아랫사람 시키가 해내긴 했지만예. 듣기로는 전에 사이가 안 좋았던 상사가 하필 위원장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있던데예.

행정장은 거기서 잠시 말을 끊고 사무실을 훠이 두리번거린 뒤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뭐, 그 사람 성격으로 봐가, 뭐 그런 사람이 한둘이었겠습니까.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지예. 안 그렇십니꺼?


행정장은 부산 억양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는데 그럴 때마다 행정장은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다.

작전관님, 또 저 사투리 쓴다고 속으로 흉보고 있지예. 그래도 웃으니까 좋-십니더. 힘들어도 그래 자꾸 웃으이소. 그래야 없던 힘도 납니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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