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에 대한 나름의 마지노선

부모는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다

by 작가 전우형

세 아이를 양육하는 데 있어 아내와 종종 의견 차이를 겪었던 것은 '어디까지 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아내는 가급적 아이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자 했지만 나는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기본적으로 내가 가진 양육관은 부모가 아이 대신 인생을 살아줄 수 없다는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건 내가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하는가와 별개의 문제였다. 부모는 아이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줄 의무가 있다. 아이들이 노력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을 부모가 대신해주는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터득할 수 있는 역량을 오히려 방해하는 것일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2학년, 그리고 7살이 된 세 아이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마지노선'은 아래와 같다.




밥을 차려주는 것은 동의하지만 떠먹여 주는 것은 반대다. 현대와 같은 과충족 시대에서 입맛에 맞는 음식은 부족할 수 있지만 먹을 것이 부족해 밥을 굶을 일은 없다. 반찬투정을 받아주는 것도 좋지 않다. 싫어하는 음식을 굳이 억지로 먹일 필요는 없지만 해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다고 해서 다른 먹거리를 다시 준비해주는 것은 반대다. 먹을 만큼 음식이 충분하다는 것, 누군가 식사를 준비해준다는 것은 그 자체로 충분히 감사할만한 일이다. 감사를 배우기 이전에 불평불만부터 배워서는 안 된다. 먹고 안 먹고는 자신의 선택이지만 먹지 않았을 때 다가올 배고픔 역시 선택의 결과로 수용해야 할 부분이다.


입을 옷을 챙겨주는 것은 좋지만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정을 받아주는 것은 반대다. 옷이 어디에 있는지 안다면 찾아 입는 것 정도는 아이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챙겨주는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옷은 스스로 찾아 입는 것이 맞다. 빨래를 정리할 때도 자신의 옷은 스스로 서랍장에 가져다 정리하는 것이 좋다. 넣고 정리하며 자신의 옷이 어디에 있는지 익힐 수 있다. 예쁘고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보다 자신의 옷은 자신이 정리하는 것이라는 기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식사를 준비할 때도 모든 것이 준비된 후에야 와서 밥만 먹는 것은 반대다. 아이들도 식사를 준비할 때 수저를 놓거나 식탁을 정리하는 것, 밑반찬을 꺼내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아이들은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해볼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식사 후에 그냥 자리를 뜨는 것도 반대다. 자신의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두는 것 정도는 아이들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식사 준비와 뒷정리는 누구 한 사람만의 과업이 아니다. 집안일은 그곳에서 살아가는 구성원 모두의 일이다. 걷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수준의 어려운 것들이 아니라면,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은 스스로 참여하는 것이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


학교 준비물을 알려주는 것은 좋지만 나서서 챙겨주는 것은 반대다. 학교를 가는 주체는 아이들이지 부모가 아니다. 내일 자신이 무엇을 할지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아이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이 관심을 부모가 대신 가져야 할 이유는 없으며, 아이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학교에 가서 무엇을 할지 스스로 준비하고 생각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부모가 해줄 부분은 아이들이 준비하기 어렵거나 따로 구입해야 하는 것을 지원해주거나 대신해주는 성질의 것들이다.


학교에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등교시간에 맞춰 출발할 준비는 스스로 해야 한다. 시간이 촉박할 시점까지 놀기만 하다가 출발시간이 다 되어서 부모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은 반대다. 학교를 가는 것은 학생인 아이이지 부모가 아니다. 준비할 생각이 없다면 학교에 지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방법이다. 비가 올 때 우산을 챙겨줄 수는 있지만 부모가 우산을 대신 씌워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공부나 학습 등에 있어 원하는 책을 구입해주거나 학습지 등을 할 수 있게 지원해줄 수는 있다. 하지만 책을 대신 읽어주거나 학습지 진도를 체크해주거나 정해진 분량만큼 하지 않았다고 꾸지람을 주는 것은 반대다. 나는 철저히 공부에 관해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만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차라리 학습지를 하지 않아 꾸지람을 하는 것보다 조용히 학습지를 끊어버리는 것이 낫다. 공부의 주체는 아이다. 문제 푸는 것이 어려워 질문을 할 때 도와줄 수는 있지만, 문제를 대신 풀어줄 수는 없다.




내가 가진 양육관의 모토는 '삶의 주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마지노선'을 벗어났을 때, 같은 생활양식이 반복될 때 아이들을 질책한다. 인생의 주체는 엄연히 '자기 자신'이다. 아직 독립된 성인이 되지 못한 아이에게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부모가 아이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부모는 물을 구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아이가 다치거나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능력을 갖출 시기까지 물을 길어다 주는 조력자이자 보호자다. 길어다준 물을 컵에 담아 마시는 주체는 아이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아이는 부모의 부속품이 아니며 자신의 이름을 가진 한 명의 인격체다. 아이들에게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것을 해주는 것은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긍정적이지 않다. 부모가 아이에게 많은 부분을 개입할수록 아이들은 의존적이 되고, 수동적이 되며, 독립에 필요한 능력을 기르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인식은 독립성을 가진 한 사람으로 자신을 바라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스스로 해보고 부족한 부분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것과, 해보지도 못한 채 대신해주는 부모 뒤에 숨어 지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위험한 일 또는 아이가 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일을 강제로 시켜서는 안 되겠지만,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할 수 있게 기다려주고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내일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학교에 공부하러 가는 학생이 자신이 어떤 과목을 공부할지 시간표도 모르고 무엇을 준비해서 가야 하는지도 모른다는 것은 대단히 비극적인 일이다. 이런 경우라면 차라리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낫다. 어떻게 준비할지 방법을 모르는 것과, 자신이 수업을 준비하고 다음에 있을 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방법을 모를 때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차원에서 함께 준비해줄 수는 있지만, 그 준비를 누가 해야 하는지, 왜 그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어째서 부모가 도와주는지 등에 대한 부분은 반드시 알려주고, 인지시켜줄 필요가 있다.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는 약간의 부담과 스트레스가 있으면 어떻게 준비하고 챙겨야 하는지 그것을 대하고 익히는 자세와 태도가 달라진다. 모르는 것을 직접 알려주는 것보다 모르는 것을 찾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이는 스스로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부모의 보호 아래 성장하는 것뿐이다. 결국 아이는 부모 곁을 떠나야 한다. 아이가 가진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과 부모가 무한히, 그리고 당연히 무언가를 해주고 베풀어야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가족 간에도 '당연한' 것은 없고 '감사해야 할' 것은 차고 넘친다. 부모라고 해서 아이들의 일을 당연히 대신해주어야 할 의무는 없다. 차갑고 딱딱하게 보일 수 있는 양육관이지만 오히려 이것이 부모와 아이가 공존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다. 부모도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은 아니며, 아이들 역시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대단한 존재다. 부모가 아이를 아무것도 못하는 보호받아야만 할 존재로 여기면 아이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느끼게 해 주고, 그런 아이들의 노력을 인정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내가 가져야 할 자세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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