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노! 신이 디테일에 있다

생각 지름길의 원리

by 임희걸

나는 팀 쿡 시대 아이폰 유저


저는 팀 쿡 이전의 아이폰을 잘 모릅니다. 아이폰을 쓴 지 5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최근의 아이폰은 여러 사람이 비판하는 것처럼 혁신은 내려놓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기능은 크게 달라지는 줄 모르겠고 디테일에서만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것이 잡스와 다른 팀 쿡의 노선이 아닌가 싶습니다. 쿡은 혁신 대신 제품 완성도를 선택했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에게 맛집을 물려받았다고 칩시다. 그 가게는 새로운 메뉴를 여럿 히트시켜 손님이 줄을 서는 곳입니다. 이제 당신이 그걸 물려받았습니다. 당연히 이제부터의 가게 운영 전략이 고민이 되겠죠?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버지의 스타일 그대로 계속 신 메뉴를 내놓으실 건가요? 줄줄이 메뉴만 늘리다가는 메뉴를 줄이라는 골목식당 백종원 대표에게 혼쭐이 날 지 모릅니다. 아니면 당신만의 가게 운영 전략을 만들 건가요? 이번에는 아버지의 신 메뉴에 감탄했던 단골손님들이 아우성을 칠 겁니다.


팀 쿡도 비슷한 고민을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언론과 애플의 팬 클럽은 잡스의 혁신을 계속 이어가라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그런 획기적인 제품을 줄줄이 내놓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요? 쿡은 고민 끝에 혁신 따위는 잡스의 무덤에 함께 묻고 완성도를 높이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새로운 것 좋아하는 선대의 경영 방침을 따라가다 망하느니 내가 잘하는 걸 하자, 괜찮은 선택입니다. 문제는 제품 완성도를 높이는 일 또한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보통 회사 일을 할 때도 80% 정도까지 완성도를 높이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1%를 진도 나가기가 참 힘이 듭니다. 이 단계는 성과도 안 나오는데 이전 단계에 비해 막대한 시간과 노력, 돈이 들어갑니다.


제가 아이폰에서 완벽함을 느끼는 부분은 곡선 부위의 곡률, 소재의 감촉, 색감입니다. 아이폰의 모서리 곡면 디자인은 딱 적당한 라운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아마 팀 쿡이 다양한 곡률의 시제품을 만들고 그중에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취했을 거라고 예상합니다. 표면 소재 또한 고르고 또 골라 손에 착 붙는 유리 재질을 만들어 냈습니다. 거기다 색상도 무수한 시제품 제작과 선별이 이어졌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나라 회사에서 막판 완성도를 높인다고 이런데 돈을 쏟아부었으면 그 임원은 한 3번 정도 잘렸을 겁니다.



악마가 아닌, 신이 디테일에 있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유명한 말이죠. 대충 보면 쉬워 보이는 일이지만 막상 시작하면 숨겨진 노가다가 끝도 없다는 뜻입니다. 근데 이 말은 원래 "신은 디테일에 있다."에서 온 패러디라고 하네요. 신이 디테일에 있다는 것은 독일의 저명한 건축가의 말로 명작이 되려면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완벽하게 만들어야 함을 뜻합니다. 팀 쿡 아이폰의 신도 디테일에 있다고 보입니다.


제 회사 후배 중 한 친구는 명품 전자제품 사랑이 남다릅니다. 아이폰 11 프로에 뱅 앤 올룹슨 무선 이어폰을 연결해 음악을 듣습니다. 노트북은 MS의 고가 제품 라인인 서피스 북을 쓰죠. IT 덕후인 그 친구에게 왜 그런데 돈을 쓰냐고 물으니 이렇게 대답하더라고요.


"이런 제품은 언젠가 좀 식상해졌을 때 문득 디테일을 보고는 '아 이런 데까지 신경 써서 만들었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해요. 그럼 다시금 사랑하게 되거든요."


후배의 말처럼 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완성도 있게 만든 제품이 명품입니다. 사실 잘 보이지 않는 부품, 잘 쓰지 않는 기능까지 최고로 만든 제품을 사는 행동은 비합리적입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그런 걸 사면 두고두고 볼 때마다 뿌듯한 것을요. 팀 쿡은 세계 최초의 유일무이 아이폰을 포기하는 대신, 소유욕을 뒤흔드는 아이폰을 만드는 전략을 택했습니다.


스티브 잡스와 팀 쿡, 두 사람은 모두 초절정 고수입니다. 하지만 각기 생각하는 법은 크게 다릅니다. 잡스는 늘 새로운 길에 집착하는 반면, 쿡은 디테일과 완성도에 빠져 들었습니다. 업의 고수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사고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 비슷한 성취를 이룬 사람이라도 머릿속이 작동하는 길은 상당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정신모형(Mental Model)' 입니다. 이들의 통찰을 배우고 싶다면 정신모형 개념을 이해하고, 숙달된 정신모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정신모형이 뭐냐고요? 100명의 1명 정도 궁금해하실 분을 위해 이론적 내용을 아래에 담습니다.




혹시나 궁금할 분들을 위한 설명 (아마 안 궁금하실 듯)


정신모형은 영어 ‘멘탈 모델’의 우리식 번역입니다. 다른 책에서는 심성(心性)모형, 심상(心象)모형, 심적 표상(表象)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1943년 심리학자 크레이크는 “정신모형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인지하고, 그 원리를 이해하고, 그에 따른 우리 반응을 결정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일종의 상징체계이다.”라며 처음으로 개념을 정리했습니다. 이후 1983년에는 프린스턴대 교수인 존슨-레어드가 멘탈 모델(Mental Models)이라는 책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학계에 알려집니다. 존슨-레어드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정신모형을 활용하여 세상에 벌어지는 많은 일을 해석하고 이해한다.”라고 합니다. 어떤 모형을 갖느냐에 따라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다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정신모형은 가르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미 나름의 모형을 가지고 있는 고수라 하더라도 자신의 생각법을 어떻게 전수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가르쳐 주지 않는다기보다는 가르치지 못한다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정신모형이 이렇게 가르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생성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정신모형이 생성되는 원리는 뇌의 많은 기능과 마찬가지로 기억과 연관이 깊습니다. 우리 뇌에서 정보는 어떤 종류이건 기억 망에 저장됩니다. 기억 망 깊은 곳에 저장하기 위해서는 기억에 깊이 새겨지는,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합니다. 심리학자 케네스 보워스에 따르면 우리의 뇌는 특정 문제에 맞닥뜨리면 기억 망이 활성화하면서 해답을 찾습니다. 두뇌 활동은 거의 무의식 수준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현상을 잘 눈치 채지 못합니다. 기억 망이 충분히 활동을 하여 실마리를 찾기 시작하면 갑자기 눈앞에 얼굴에 맞는 이름이 떠오르거나 가물거리던 단어가 생각납니다. 이는 매우 간단한 형태의 직관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일을 일상생활에서 수없이 경험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의 얼굴을 알아보거나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과정을 조목조목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이 과정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이죠.


한 가지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들은 두뇌에 여러 개의 기억 망이라는 길을 가지게 됩니다. 머릿속의 복잡한 길을 자주 걸어 보았기 때문에 정보 조각들 사이에 연결된 길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고도로 복잡한 문제와 마주치면 의식하지 않고도 직관의 안내에 따라 수백 갈래의 길을 따라 해답 탐험을 시작합니다. 온갖 종류의 신경회로가 이곳저곳에서 반짝반짝거리면서 연결을 시도합니다. 그러다 별안간 숨어 있던 아이디어와 해결책이 관련된 신경 세포가 연결됩니다. 그때의 느낌은 어떤 경험보다도 짜릿하고 뿌듯합니다. 두뇌 어딘가에 숨어있던 답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를 '유레카 현상'이라고도 부릅니다.


이러한 직관은 일종의 정신모형에 해당합니다. 어떤 분야든 초보자에게는 미숙한 형태의 정신모형이 생겨납니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스스로의 정신모형을 되돌아보면서 개선해 갑니다. 학습은 초보 단계의 정신모형을 가다듬어 정교하게 만듭니다. 정신모형을 다듬어 나만의 모형을 만들고, 또 모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직관의 레벨이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운전에 한 번 비유해 보겠습니다. 처음 운전을 배울 때는 잔뜩 긴장하여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입니다. 운전대를 돌릴 때, 가속 페달을 밟을 때, 깜빡이를 켤 때도 조심조심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운전을 한 번 하고 나면 녹초가 되죠. 그러나 점점 운전이 숙달될수록 음악도 듣고 옆 사람과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심지어는 운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게 됩니다.



반복된 훈련으로 직관이 생겨나는 원리, 청킹(Chunking)


직관은 한 가지 주제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스킬을 갈고닦은 결과로 나타납니다. 직관은 장기기억의 영역에 저장된 스킬입니다. 우리 뇌에서 단기기억에 저장된 정보가 장기기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반복 훈련이 필요합니다.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동할 때와 습관적인 행동을 할 때, 뇌가 작동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습관적 행동은 뇌 가장 안쪽에 있는 기저핵이라는 부위를 사용합니다. 기저핵은 눈의 안구가 움직일 때처럼 자동적이고 무의식적 행동을 담당하는 부위입니다. 어떤 지식이나 기술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훈련하면 뇌의 기저핵 영역에 기록됩니다. 반복 숙달된 생각이나 행동이 이제는 자동화 시스템에 입력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생각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뇌가 적게 일하기 위해 잔꾀를 부리기 때문입니다. 매번 의식적으로 결정하게 되면 뇌가 반응하는 속도도 늦어지게 마련이죠. 뇌는 단계를 생략하고 간단하게 일할 방법을 찾습니다. 자주 반복되는 일련의 생각과 행동을 하나의 단일한 절차로 취급해 버리면 어떨까요? 굳이 매번 생각해 결정할 필요 없이 연습한 행동이 반사적으로 나오게 될 겁니다. 약삭빠른 뇌는 이런 방식을 활용해 훨씬 빠르고 편리하게 정보를 처리합니다.


이렇게 행동과 생각을 묶는 방법이 청킹(Chunking)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청킹이 어떻게 고도로 효율적이고 통합적인 기능을 하는지 설명하기 위해 ‘매크로’라는 말을 씁니다. 매크로는 우리가 자주 쓰는 MS-오피스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같은 명령을 여러 번 사용해야 할 때 이를 묶어 놓은 단축 기능이 매크로입니다.


예술이나 스포츠를 살펴보면 청킹의 사례가 많습니다. 음악가는 어떻게 음표를 떠올리기도 전에 손가락을 움직이는 걸까요? 체스 선수는 어떻게 말의 배치만 보고 현 상황을 파악하고 게임이 어떻게 펼쳐질지 알아낼까요? 스포츠 선수들은 어떻게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기술을 펼칠까요? 청킹을 알면 이 모든 현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연아 선수도 처음에는 트리플 악셀을 뛰기 위해 동작 하나하나를 일일이 생각해야 했습니다. 점프는 얼마만큼 뛰어야 할지, 몸의 회전 속도를 어떻게 할지, 회전할 때 팔과 다리의 위치는 무엇이 맞는지... 기술을 이루는 각 부분을 배웠습니다. 부분 동작이 익숙해질수록 세세한 동작들은 점점 뭉쳐져 생각의 덩어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점프는 이 느낌, 회전은 이 느낌으로...’ 하고 각 생각 뭉치만 잘 다루면 되는 단계에 이릅니다. 그러다 어느날 연습 중에 완벽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죠. ‘그래 이거야!’ 그때는 복잡한 스킬 전체가 ‘하나의 느낌’, ‘하나의 이미지’와 같이 기억됩니다. 이후 시합에서는 이 느낌만 떠올리면 됩니다.




누굴 통해 배울 것인가


책 속의 인물이건, 실존하는 인물이건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웁니다. 당신은 누구의 정신모형을 선택하실 건가요? 잡스의 정신모형? 다채로운 지식을 연결하여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생각법을 배울 겁니다. 대신 늘 새로움에 목말라해야 하니 영혼의 안식이란 없겠죠. 아니면 쿡의 정신모형을 선택할 건가요? 내 제품과 서비스가 점점 완벽해지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재미는 없겠네요. 누구를 나의 롤모델로 정할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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