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지름길을 만든 롤모델
직장생활을 하면서 갑갑할 때는 몇 년간 제자리를 맴돈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물론 인간관계로 골치를 썩이거나 업무 자체에서 오는 스트레스도 있습니다. 이런 스트레스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안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장이 멈춰 있다고 생각할 때 느껴지는 허무함은 번-아웃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어느 날 문득 뇌리를 스치는 ‘요 몇 년간 나는 무엇을 했을까...’ 하는 생각.
이럴 때 일의 고수를 만나면 눈이 번쩍 뜨입니다. ‘나도 저렇게 한 번 해 볼까?’하는 생각에 의욕이 차오릅니다. 그 사람이 참말로 고수이건 아니건 내가 고수라고 믿고 모델로 삼아봐야 하는 이유입니다. 설사 잘못된 믿음이었다는 점이 밝혀지더라도 나는 새로운 시도를 했고 색다른 길을 걸어보았기 때문에 무의미한 시간만은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많은 보험사에게 방카슈랑스는 커다란 기회였습니다. 방카슈랑스는 은행과 보험사가 제휴하여 은행 창구에서 보험 상품을 판매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보험사보다는 은행의 지점망이 촘촘하고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많은 보험사들이 은행과 제휴를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후발주자로 이 시장에 들어간 저희 회사는 먼저 시장을 차지한 경쟁자보다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 당시 ‘제안서 작성의 고수’라는 J과장님을 전격적으로 스카우트합니다. 나이를 감안하여 직급은 과장이었지만 실제 연봉은 다른 과장보다 수천 만원 차이가 났습니다.
막상 J과장님을 보고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해외 보험사 마케팅 연구회>라는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J과장님은 해당 카페의 운영진이었고 우리 둘은 온라인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사이였습니다.
이런 인연과 한 두 번의 술자리로 J과장님은 저에게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한 번은 그 형님 자리로 찾아갔다가 직접 제안서를 작성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한창 제휴를 맺기 위해 노력하던 K은행의 임원 조직도가 붙어있었던 점입니다. 그 조직도에는 임원별로 담당 업무, 출신 지역 및 출신 학교, 주요 경력사항, 인맥, 취미, 심지어 골프 실력 등의 메모가 빼곡히 적혀 있었습니다.
“형님, 이 조직도는 뭐예요? 왜 이런 걸 만들죠?”
J과장님은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프러포즈를 하려면 연애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할 거 아냐? 내 제안서의 고객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영화에는 경찰이 조폭의 계보도를 화이트보드에 붙여놓은 장면이 흔히 나옵니다. J과장님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조직도를 그려놓고 제안서 작성을 시작했습니다. 제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에는 행장, 부행장 등 주요 경영진이 참석하는데 J과장님은 그들의 취향을 미리 간파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조직도를 작성하기 위해 그 은행에 다니는 지인들을 탐문하고, 임원 관련 기사를 모으고, 각종 경영공시 자료를 수없이 뒤졌습니다. 본인의 마음에 들 정도로 조직도를 만드는 데는 3~4주가 걸린다고 했습니다.
“어차피 각 회사가 제시하는 조건은 거의 비슷할 거야. 그렇다면 어느 회사를 선택할지는 아주 작은 차이에 의해 결정되지. 주요 직책을 맡은 은행 임원들이 다 비슷해 보여도 맡은 업무별로 고민이 많아. 재무 담당 부행장은 이 제휴 계약이 우리 은행에 얼마만큼 이익을 가져다줄지 간단한 수치로 표현해 주길 원하고, 소매 부문 부행장은 제휴 판매 때문에 은행원들의 본업이 흔들리지 않을까 고민을 하지. 법무팀장은 제휴로 고객 정보를 공유하게 되면 법률적인 문제점은 없는지 묻고 싶을 거고. 그 고민을 깊이 이해하고 제안서에 해답을 모두 담아야 해.”
하지만 그렇게 상대 회사의 임원 정보를 조사한다고 그 마음까지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의 마음을 읽기가 얼마나 어려운가요? 이런 표면적인 정보로 생각을 읽어보려 노력한다는 점이 잘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J과장님은 다음과 같이 답해 주었습니다.
“당연하지! 같이 사는 배우자도 전혀 몰랐던 새로운 모습을 종종 보는데, 몇 주 조사한다고 그들의 생각을 모두 알 수야 있나. 하지만 이걸 하고 안 하고는 분명 차이가 있어. 대부분의 조직은 의사결정이 모든 사람의 의견에 따라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아. 특히 임원들은 정치적 관계에 따라 영향력이 각기 다르지. 어떤 부행장의 영향력이 특히 크거나 차기 행장으로 언급되면 다른 임원들은 눈치를 보고 그가 손을 들어주는 회사에 표를 던지지. 하지만 외부인은 누가 영향력이 큰지 잘 알기 어려워. 심지어 조직 내부 사람이라 해도 임원 간의 관계는 잘 모르기도 하고.
나는 영향력이 큰 임원을 최대한 파악하려고 노력해. 모든 임원들의 관심사를 반영해 무조건 제안서의 양을 늘릴 수는 없거든. 몇 주 동안 반복해서 은행의 핵심 인물들을 연구하다 보면 어렴풋이 보여. 아 이 사람이 키-맨이구나 하고.”
J과장님을 보며 느낀 점은 일단 생각의 틀이 굉장히 다르다는 점이었습니다. 제안서를 작성하는 뚜렷한 전략이 있으면서 동시에 매우 디테일한 부분까지 꼼꼼히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숲을 보면서도 나무 하나하나의 특징까지 꿰고 있는 고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그날그날 떨어지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다른 생각은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는데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나도 이런 번뜩이는 기획서를 한 번 써보고 싶다!’
누구에게나 통할만한 글을 쓰려고 하다 보면 결국 누구에게도 통하지 않습니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하고, 그 독자를 가급적 생생히 상상하면서 쓰라고 하죠. 글쓰기 책을 보신 분들은 누누이 들었던 말일 것입니다. 제안서나 기획서도 글에 해당합니다. 내 기획서를 읽는 고객이 누구인지 염두에 두고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원칙적인 이야기만 들어서는 바로 실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수를 만나고 그의 노하우를 어깨너머로 볼 수 있어서 좋은 점은 그 방법이 아주 생생하다는 점입니다. 당장 고수의 방법을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어도 ‘아, 이런 거였구나!’ 하고 느낄 수는 있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눈앞에서 생생한 실천 방법을 보면 나도 한번 해 볼까 하는 도전 정신이 불타오릅니다. 늘 열정에 가득 차 회사를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대부분은 죽지 못해 다니는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직장생활이 재미있는 점은 가끔 이렇게 ‘불타오를 때’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누군가와의 만남으로 불타오르는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도저히 주변에서, 직장 내에서 고수를 찾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는 책의 저자를 만나보면 어떨까 제안하고 싶네요. 하나의 주제를 벼르고 또 별러, 논리 구조가 꽉 짜인 한 권의 책으로 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책을 만들면서 작가의 생각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됩니다. 막상 얼굴을 보며 이야기를 들어보면 책에 미처 담지 못한 작가의 생각을 많이 엿들을 수 있습니다.
작가들은 자신의 책을 알리기 위해 애가 닳습니다. 이 가을, 여러 곳에서 '작가와의 만남', '북 토크' 행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용도 무료에서부터 5천 원~ 1만 원 정도로 부담이 없으니까요. 아직 북 토크에 가보지 않은 분이라면 작가라는 고수를 만나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