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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기적 이타주의

브런치북 by_지니

by 생각창고 지니

예민한 사람들은 대개 이타주의자로서 삶을 시작한다. 자신의 관심사나 욕구보다는 타인의 필요를 먼저 감지하고, 정의나 평화, 화해 같은 더 높은 가치를 우선시하며 살아간다. 이러한 성향은 처음에는 미덕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신을 놓치게 만들기도 한다.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내 믿음이 성경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더라도, 그와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며 스스로를 설득하고 타협점을 찾으려 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신념의 색깔이 흐려진다.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예민한 사람은 자신보다 ‘어머니 먼저’, ‘언니 먼저’, ‘동생 먼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정작 자신의 필요는 뒤늦게야 감지하게 되고, 억눌린 감정이 어느 순간 터지며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표출되곤 한다. 남자친구를 배려하는 마음에 원하는 애정의 크기를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부족함만을 느끼게 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예민한 사람들은 마치 케이크를 나눠주는 사람처럼 산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조각을 나눠주고, 맨 마지막에야 “나는 어떤 조각을 먹고 싶었더라?” 하고 되묻는다. 그리고는 남은 것이 없다는 사실 앞에서 억울함과 허탈함을 느낀다. 그제야 부당함을 제기하고, 되찾으려 애쓰지만, 이미 지나간 자리에선 되려 오해만 받기 쉽다.

“왜 이제 와서 화를 내? “라는 말은 그동안 참아온 모든 시간들을 무색하게 만든다.


경계선 점검표
- 당신은 언제 당신의 경계가 침범당했음을 알았는가?
- 그것을 깨닫기 바로 전에 어떤 기분을 느꼈는가?
- 그것을 깨닫기 바로 전에 신체적으로 무엇을 느꼈는가?
- 경계를 침범당했다는 걸 안 뒤에 무슨 생각을 했는가?
- 그것이 상처가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가?
- 경계 침범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부작용'이 있었는가?
- 부작용이 다른 사람에게 가해졌는가? 당신 스스로는 어떤 피해를 보았는가?
- 경계를 침범당한 이후 뒤로 물러났는가? 접촉을 끊어버렸는가? 대담하게 나가게 되었는가? 험담을 했는가? 변명을 했는가? 다른 사람에게 더욱 맞추어 주게 되었는가?

_『예민함이라는 무기』, 롤프 젤린 지음


침해당한 경계 점검표

1. 감정 표현의 경계: '이 정도는 참아야지'가 아니라 불편할 때 '불편하다'말할 수 있는 경계
- "그 말은 나에겐 상처로 느껴졌어.", "지금 이 상황이 조금 불편해요."

2. 시간 관리의 경계: '바빠 보이지 않으면 언제든 불러도 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나만의 우선순위와 리듬을 존중하는 경계
- "오늘은 힘들어서 이 약속은 다음에 잡자."

3. 관계 거리 두기의 경계: '회복을 방해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물리적 혹은 심리적 경계
- "지금은 이 주제로 이야기하기 어렵다.", 모임에서 스스로 빠져나올 타이밍 설정

4. 언어적 존중의 경계: "그냥 농담인데 왜 그래?"라는 말로 반복되는 무례한 언행에 대한 경계
- "그 말은 나한테 웃기지 않아요.", "그 이야기는 듣기 어렵네요."

5. 공간 보존의 경계: 내 물리적/심리적 공간에 허락 없이 침범당하지 않을 권리
-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방해받지 않는 고정 휴식 장소 만들기


위 경계선 점검표는 자기 성찰의 중요한 부분이며 건강한 관계(회복의 방향)와 삶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대부분의 경우 질문을 통해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부분을 지키고 싶은지 명확히 하는 데 (경계 침범 인식) 도움이 될 것이며, 그로 인해 나의 케이크를 지켜나갈 방법을 마련해 볼 수 있다. (회복)


그래서 예민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경계 짓기’다. 이는 차갑거나 이기적인 태도가 아니라, ‘나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받아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케이크를 나누기 전에 내가 한 조각을 먼저 챙기는 것, 그것이 결국 진짜 배려가 된다.


영화 <도쿄!>(2008)는 도쿄로 이사 온 젊은 여성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과 소외감을 느끼며 점점 '가구'로 변해간다는 기이하고 은유적인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영화감독인 남자친구를 따라다니며 헌신하던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케이크’—즉, 자존감과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결국 그녀는 몸이 가구로 변했을지언정,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로 다시 자리매김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낸다.

예민한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자기 것을 지키는 일’조차도 소모적인 싸움이지만,

그런 기질 자체는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이 이야기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경계선 점검을 마쳤다면, 그런 자신의 색깔도 인정하고, 받아들여 보자.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할수록, 오히려 타인과의 조화와 균형에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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