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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Sep 04. 2020

정말 사랑일까?

미성년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하여

최근 형법 개정으로 미성년자 의제강간 기준 연령이 13세에서 16세로 상향되었다. 이에 따라 16세 미만의 미성년자와 성관계를 하면 상대방의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처벌이 된다. 다만 피해자가 13세 이상 16세 미만이면 범죄를 저지른 자가 19세 이상의 성인인 경우에만 처벌된다. 즉, 15세와 17세가 동의하여 성관계를 했다면 17세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구청의 사례회의에 참여했다.

사례회의는 사례관리 대상 세대의 선정이나 경과, 종결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회의인데, 사례관리란 구청이나 동사무소의 복지정책과에서 지역의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의 세대를 발굴하여 주거, 교육, 의료, 법률 등 필요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지원하고 계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사업으로 알고 있다.


나는 사례회의에 참여하여 법률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 지원을 한다. 사례회의에 가 보면 정말 어렵고 안타까운 가정이 너무나 많다.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을 그런 사정을 가진 가정들이다.

보통 채무문제나 이혼문제, 형사범죄 등의 법률적 문제들이 다른 경제적, 교육적, 사회적 문제들과 복합적으로 그들 가정에 존재한다.


사례관리 대상 세대 중 한 세대의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공무집행방해죄로 현재 구속되어 재판을 기다리는 중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혼하여 어머니와는 연락이 닿지 않으며, 딸은 중학교 2학년인데(만 15세) 가출 후 30대 중후반의 이혼남(전처와의 사이에 6세 여자아이가 있다고 함)과 사이에 아기를 가져 현재 임신 6개월이라고 하였다.

휴...한숨부터 나왔다. 내가 물었다.

"아니,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 아닌가요? 고소는 했나요?"

그랬더니 사례관리 선생님께서 하는 말,

"사랑이래요...지금 그 집에 남자가 들어와서 같이 살고 있어요. 아이 낳아서 같이 키울 거래요."

"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관계는 정말 사랑일까?

당시는 법이 개정되기 전이라, 만13세 이상이었던 중학교 2학년 딸과 동의에 의한 성관계를 했던 30대의 그 남자는 처벌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 '동의'라는 것이 정말 그 학생의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동의'가 맞는지 자꾸 의문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루밍 성범죄 문제는 심각하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자연스러운 통로로 접근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신뢰를 쌓고 자기를 의지하도록 만든다.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완전히 지배한 후 피해자가 성적 침해 행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길들이고 폭로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그들이 이용당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며, 그들의 성관계는 겉으로 보기에 동의에 의한 성관계로 보인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고소도 잘 이루어지지 않고, 한다 하더라도 이에 대한 수사나 처벌이 어렵다. 흔히 선생님과 제자, 목사와 교인, 회사에서의 직장 상사와 후배 등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그루밍 성범죄는 미성년자에게 국한한 문제는 아니지만 미성년자들은 성인보다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


몇 년 전 40대 연예기획사 대표가 15세 여중생을 임신시켜 출산까지 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대해 1, 2심은 '중학생이 부모 또래의 중년 남성과 우연히 알게 된 지 며칠만에 이성으로 좋아해 성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으나, 대법원에서는 여중생이 대표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낸 점, 평소 애칭을 사용한 점 등을 근거로 '연인 관계'라고 결론 짓고 무죄라 판단했다. 어린 나이에 임신한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부모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상대방 요구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여중생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무죄 판결이 있은 후 이 남자는 여중생을 상대로 무고를 이유로 형사 고소하고 민사상 손해배상청구도 했다고 하니, 정말 적반하장도 유분수에 화딱지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도 이렇게 열불이 나는데, 당사자와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떨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이 판결은 여러 기관과 매체 등에서 비판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도 공분을 일으켰다.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상식적이지 않은 판결임에는 틀림없다. 사랑이라면 왜 그 여중생은 무서움과 불안에 떨었으며 부모님에게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고 관계를 숨겨야 했을까.

그루밍 성범죄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법원은(지금은 개정되었지만) 만 13세만 넘으면 일단 '동의 여부'부터 따진다.

13세 부터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보고 성관계의 의미와 그로부터 발생되는 임신 등 결과에 대한 책임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예상한 상태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개방적인 미국에서도 일부 주는 그 연령을 18세로 삼고 있는데 성교육도 제대로 하지 않는 보수적인 우리나라에서 13세를 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이게 앞뒤가 맞는 것인지, 참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15세를 떠올려보아도 글쎄, 그 때는 정말 성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호기심은 있는 나이고 여러가지 고민이 많은 때라,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 학교나 과외선생님이 친절히 도와주고 고민을 들어주면 친밀감을 넘어 호감이 생길 수도 있고, 그러다 선생님이 혹시 나쁜 맘이라도 가지게 된다면 내심으로는 원하지 않는 행위도 어떨결에,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것을 과연 진정한 '동의'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한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 학생이 제대로 알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학생은 혼란스러움에 빠지고 불안과 걱정에 휩싸이게 되고 그러한 심리를 이용해 또 교묘하게 행위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루밍 성범죄는 이렇듯 서서히, 가랑비에 옷 젖듯 아이들에게 다가가 아이들의 목을 옥죈다.

그러다 잘못된 것임을 인지하고 학생이 신고를 하면, '왜 처음부터 싫다고 거절하지 않았냐', '단호하게 뿌리치지 않았냐'. '왜 이제서야 신고를 하느냐' 하는 말을 수사기관에서 듣게 된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데, 13세만 지나면 어른과 같은 성적 자기결정권을 갖고 있다고 전제하고 '왜 그러지 않았냐'고 오히려 아이들에게 되묻는 것이다. 치밀한 상대방은 미리 정교하게 동의의 증거를 마련하고 '서로 좋아서 한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아이들이 수사기관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것과 달리, 가해자들의 방어논리는 갈수록 촘촘해지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성적 동의 연령'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16세로 그 연령이 상향된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 애초부터 이러한 일이 발생하지 못하게, 남자든 여자든 어릴 때부터 올바른 성교육을 통해 제대로 된 성적 가치관과 성윤리를 가질 수 있도록 가정과 교육기관에서 지도하고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




다음 사례회의에 갔더니 임신한 딸의 아버지가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단다. 아버지와 임신한 중학생 딸, 딸이 임신한 아기의 아버지인, 딸과 나이 차이가 20살도 더 나는 그 남자와 셋이서 산단다.

딸의 아버지까지 알고 있고 용인했다니 뭐,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나.

부디 아무 잘못도 없는 곧 태어날 아기가 잘 성장하기만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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