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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Sep 07. 2021

깊은 불신의 골

제일 난감하고 힘든 상담

일을 하다 마주치는 많은 사람들이 사회취약계층이라, 어렵고 안타까운 상황에 놓인 분들과 상담을 진행하고 이후의 절차를 지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정폭력으로 인하여 자녀들과 함께 집에서 도망쳐 나온 의뢰인의 이혼소송 및 형사절차를 지원하고 채무문제 해결을 조력한다든지 데이트폭력·학교폭력·스토킹범죄의 범죄피해자들에게 수사단계에서부터 적절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응방안을 안내한다든지 아버지의 사망과 외국인 어머니의 귀국으로 혼자 남겨진 지적장애 아동을 위하여 친권상실 및 미성년후견인 선임절차를 조력한다든지 소멸시효가 완성되었음에도 채무독촉에 시달려 온 의뢰인이 오랜 채무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조력한다든지...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자세히 알 수 없었을 이야기들이다.

개개인의 사연들이 저마다 매우 안타까워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게 되고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하게 된다.  


물론 모든 이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면야 가장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법의 테두리 안에서 더 이상의 방법을 찾을 수 없는 때이다.

이런 경우 당사자인 의뢰인은 안 그래도 억울한 마음을 가진 상태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고자 나를 찾아오는데, 나에게마저 희망적인 말을 듣지 못하니 본인의 억울함만 더욱 가중되어 상담이 매우 힘들어진다.

말하는 의뢰인도 힘들고 듣는 나도 힘들고...

나로서도 뭔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해결책을 딱 찾아내어 의뢰인의 문제 해결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 굴뚝같지만, 방법을 계속 찾아도 도무지 보이지 않을 때에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내가 알라딘의 요술램프 속 지니는 아니니까.

이런 상담이 자주 있는 건 아닌데, 한 번 했다하면 진이 빠지는 것도 그렇고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은 것처럼 개운치 못한 느낌이라 여간 찝찝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날도 그런 상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류를 잔뜩 싸들고 나를 찾아온 분은 한 눈에 봐도 연세가 지긋해 보이는 할머니였는데, 할머니 주장인즉 사연은 이러했다.

할머니가 살고있던 할머니 소유 주택이 재건축사업 대상이 되었는데, 할머니가 고관절 수술을 하여 병원에 있는 동안 분양신청 기간이 지나버려 분양신청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현금청산 대상자가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가 이에 반발하여 건물을 인도하지 않자 조합으로부터 건물인도 소송을 당하게 되었고,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응하였으나 패소하고 말았다. 이후 어떠한 연유에서인지(1심을 대리한 변호사가 항소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기간내에 항소를 제기하지 않아 판결이 확정된 것이었다.

할머니는 억울하다며 나를 찾아오셨는데, 이리저리 고민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1심에서는 할머니 주장에 대한 증거가 부족함을 이유로 원고 승소 판결이 난 것으로 기억한다.

조합으로부터 분양신청 통지를 받지 못하였거나 조합의 통지가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면 절차의 부당성을 다투어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이에 대한 증거도 찾기 어려울 뿐더러 이미 판결이 확정되어 더이상 다툴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할머니께 불복이 어렵다는 점을 설명하였지만 본인의 억울함만을 토로하며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하셨다.

한편 할머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며, 조합장이 본인 의사 확인 없이 본인의 도장을 마음대로 가져다 찍은 사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 경위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강력히 말씀하시길래 일단 할머니의 주장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우선은 사문서위조가 가능할 수 있음을 안내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주장 내용만 들었기에 정확한 사실관계를 알지 못했고 그에 따른 증거도 미비하여 수사기관에서 받아들여질 것인지 우려가 되었다. 할머니는 강력하게 고소를 원했고, 결국 할머니의 억울한 부분을 담아 고소장 작성을 지원하였는데, 그 후 수사기관에서 조합장에게 연락을 취하여 피고소인 조사를 진행하고 관련 서류를 확보해 갔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혐의점이 밝혀지길 바랐으나,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조합장은 무혐의 불기소처분을 받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동사무소 공무원으로부터 전달받았다(이 할머니는 관련 사건으로 동사무소에도 여러차례 도움을 요청했던 분이었고, 하여 동사무소에서도 나에게 수차례 조력을 구한 바 있었다).

마음이 좋지 못했다.

할머니가 걱정되면서도, 나에게 억울한 표정으로 또 찾아오실 할머니를 어떻게 이해시켜야하나... 내가 처할 상황도 걱정이 되었다.

예상대로 할머니는 며칠 후 다시 나에게 연락을 하셨고, 나는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이후에야 할머니와의 통화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법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피해자에게 더 가혹한 것이 법이라고 울분을 토하셨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민사소송에서 패하여 본인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한 줄기 희망이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나에게 상담을 신청했는데, 민사 및 형사 모두 더 이상의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었고 할머니의 억울함이 해결되지 않아 나로서도 매우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는 케이스이다.

할머니를 이해시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아마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셨을수도), 성실하게 할머니의 사정을 들어주고 비록 원하는 결과가 아니더라도 현재의 상황을 잘 설명해 주며 해당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서 앞으로의 삶을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처럼 사법 불신과 피해의식이 심한 의뢰인들을 만나면 대하기가 정말 난감하다.

할머니가 처한 상황이 안타깝지만, 어쨌든 판결은 당사자의 주장과 증거에 기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피해자에 대한 구제도 법의 테두리내에서 가능한 것인데, 본인의 억울한 사정을 법이 다 알아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깊은 불신의 골로 빠지고야 마는 것이다.

이 때 그런 처지를 공감하지 못한 채 딱딱하게 법률 용어만 나열하고 이론만 읊다보면, 의뢰인으로부터 "너도 똑같은 한 통속이다. 어려운 사람 도와주려고 법이 있는 것이 아니냐. 모두 엉터리다."와 같은 말을 들을 수도 있다.


경찰이 피해자인 본인 말은 들어주지 않고 가해자와 통모했다고 주장하는 의뢰인이나 판사가 본인이 낸 서면을 하나도 읽어보지 않고 판결을 했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의뢰인이 있었다. 이 때 그럴리가 없다고, 수사기관과 사법부는 모든 의견을 듣고 공정하게 판단한다고 이야기해 줄 수는 없지 않나?

솔직히 이럴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면서 내가 깨달은 바는, 이러한 의뢰인을 만났을 때 일단은 본인의 편에 서서 성실하게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움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본인이 뜻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답답했던 마음이 많이 풀리고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배우자나 가족, 친구로부터 그에 대한 문제 해결 보다는 충실한 경청과 완전한 공감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그것으로부터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있지 않은가.


할머니는 잘 지내고 계실까, 문득 궁금해진다.

부디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셨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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