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소중한 아이들
며칠 전 정기적으로 법률상담을 가는 청소년상담센터에서 15세 남학생을 만나 상담을 진행하였다.
학생은 친구와 친구의 아는 형들 무리와 함께 몇 차례 뽑기방 절도를 하다 걸려서 특수절도 혐의(2인 이상이 합동하여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면 특수절도에 해당한다)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추후의 절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학생 말로는 친구의 아는 형들을 그 날 처음 보았고, 형들이 협박을 하여 어쩔 수없이 친구와 절도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했다.
학생과 만나기 전에 담당자를 먼저 만났는데, 학생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짧게 들을 수 있었다. 가정환경이 복잡했다. 다행히 동종 전과는 없었다.
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학생의 소극적인 태도나 위축되어 있는 말투는 그 학생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말이나 분위기에 잘 휩쓸릴 것만 같은 그런 성격.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앳되 보이는 학생의 얼굴에 심난함이 어려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위 학생은 촉법소년(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이 아닌 범죄소년(범죄를 저지른 만 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소년)으로, 형사책임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안의 경중에 따라 형사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즉 죄를 범한 소년은 소년법에 따라 소년보호사건으로 심리하지만, 심리 결과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범죄 사실이 발견된 경우 그 동기와 죄질이 형사처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면 검찰에 송치되어 형법에 따른 형사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에 갈 수도 있고 전과가 남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 소년법은 기본적으로 처벌보다는 교화를 우선으로 한다. 따라서 소년법에는 사회봉사명령이나 위탁처분 등 교화를 위한 10가지 처분이 있고, 그중 가장 중한 10호 처분이 장기 소년원 송치(최장 2년)이다.
학생은 담담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많이 불안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절차에 대하여 설명해 준 후, 반성문을 써서 제출할 것을 안내했다. 피해자들에게 연락하여 조금이라도 피해액을 배상하고 합의하라고 했더니 학생은 어머니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며 머뭇거렸다.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묻는 학생에게, 초범이고 피해액수가 크지 않으며 학교를 잘 다니고 있고 반성도 많이 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친구와 어울려 다니지 말고 좋은 친구들이랑 다니며 학교생활 열심히 하라고 짧게 덧붙였다.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교육자도 아니고 오지랖이 될까 싶어 그만두었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 그런가.
학생의 환경과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 범죄에까지 관여하게 된 상황이 너무 딱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보호처분을 받은 후에 이 학생이 정말로 뉘우치고 반성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또 금방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그래도 이렇게 상담센터에 와서 심리상담과 법률상담을 받고 복지사 선생님과도 관계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가 이런 학생들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 더 흉악한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제도나 장치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소년범죄가 더 이상 소년범죄가 아닌 것 같은 사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래서 형사미성년자의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등 소년법의 개정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왜 요즘 중학생들이 그토록 무섭다고들 하는 것일까. 왜 잔혹한 소년범죄가 많아지는 것일까. 그들은 왜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 않을까.
결국은 청소년 시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애정, 이를 기반으로 한 감시와 교육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정이 이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좀 더 보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원래 아기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아기를 봐도 감흥이 없었고, 결혼을 한 뒤에도 언젠가 아기를 한 명은 낳아야지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뿐이다.
나와 3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은 아기를 좋아했다. 매일같이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 애원하고 밤이면 밤마다 기도하더니, 정말로 엄마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임신을 해서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남동생을 낳았고, 여동생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동생이 생겨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남동생을 엎고 돌아다니며 물고 빨았다. 나도 내 동생이니까 귀엽기는 했지만 여동생처럼 남동생을 예뻐한 것은 아니었다(당시 고등학생이라 공부에 쫓겨 그런 것도 있다. 남동생 미안).
그런 내가 내 아기를 낳고 보니 세상 모든 아기들이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너희 한 명 한 명이 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구나.
아기들은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든 선택이든 실수든, 어쨌든 부모의 결정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애정과 관심을 통해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삼 나와 동생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엄마, 아빠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꿀댕이에 대한 커다란 책임감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