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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털복숭이 Jul 20. 2020

엄마가 되고 보니

모두 다 소중한 아이들

며칠 전 정기적으로 법률상담을 가는 청소년상담센터에서 15세 남학생을 만나 상담을 진행하였다.

학생은 친구와 친구의 아는 형들 무리와 함께 몇 차례 뽑기방 절도를 하다 걸려서 특수절도 혐의(2인 이상이 합동하여 타인의 재물을 절취하면 특수절도에 해당한다)로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추후의 절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학생 말로는 친구의 아는 형들을 그 날 처음 보았고, 형들이 협박을 하여 어쩔 수없이 친구와 절도에 가담하게 되었다고 했다.

학생과 만나기 전에 담당자를 먼저 만났는데, 학생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짧게 들을 수 있었다. 가정환경이 복잡했다. 다행히 동종 전과는 없었다.

학생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학생의 소극적인 태도나 위축되어 있는 말투는 그 학생의 성격을 짐작케 했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말이나 분위기에 잘 휩쓸릴 것만 같은 그런 성격. 마스크를 하고 있었지만 앳되 보이는 학생의 얼굴에 심난함이 어려있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위 학생은 촉법소년(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형사미성년자)이 아닌 범죄소년(범죄를 저지른 만 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소년)으로, 형사책임능력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사안의 경중에 따라 형사처분을 받을 수도 있다. 즉 죄를 범한 소년은 소년법에 따라 소년보호사건으로 심리하지만, 심리 결과 금고 이상의 형에 해당하는 범죄 사실이 발견된 경우 그 동기와 죄질이 형사처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면 검찰에 송치되어 형법에 따른 형사처분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교도소에 갈 수도 있고 전과가 남을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 소년법은 기본적으로 처벌보다는 교화를 우선으로 한다. 따라서 소년법에는 사회봉사명령이나 위탁처분 등 교화를 위한 10가지 처분이 있고, 그중 가장 중한 10호 처분이 장기 소년원 송치(최장 2년)이다.



학생은 담담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으로는 많이 불안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절차에 대하여 설명해 준 후, 반성문을 써서 제출할 것을 안내했다. 피해자들에게 연락하여 조금이라도 피해액을 배상하고 합의하라고 했더니 학생은 어머니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며 머뭇거렸다. 어떤 처벌을 받게 될지 묻는 학생에게, 초범이고 피해액수가 크지 않으며 학교를 잘 다니고 있고 반성도 많이 하고 있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 친구와 어울려 다니지 말고 좋은 친구들이랑 다니며 학교생활 열심히 하라고 짧게 덧붙였다. 더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교육자도 아니고 오지랖이 될까 싶어 그만두었다.


소년범의 아버지로 불리는 천종호 판사님이 제헌절 특집에 나오심. 소년재판에 관심이 있다면 보기를 추천. (사진=유퀴즈 온 더 블럭 캡쳐)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데,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텐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 그런가.

학생의 환경과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 범죄에까지 관여하게 된 상황이 너무 딱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보호처분을 받은 후에 이 학생이 정말로 뉘우치고 반성하여 정상적인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또 금방 나쁜 길로 빠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 그래도 이렇게 상담센터에 와서 심리상담과 법률상담을 받고 복지사 선생님과도 관계를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가 이런 학생들을 위한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 더 흉악한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제도나 장치가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최근에는 소년범죄가 더 이상 소년범죄가 아닌 것 같은 사건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래서 형사미성년자의 연령을 낮춰야 한다는 등 소년법의 개정이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왜 요즘 중학생들이 그토록 무섭다고들 하는 것일까. 왜 잔혹한 소년범죄가 많아지는 것일까. 그들은 왜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잘못을 하고도 뉘우치지 않을까.

결국은 청소년 시기에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애정, 이를 기반으로 한 감시와 교육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가정이 이 역할을 해 주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좀 더 보듬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원래 아기를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지나가는 아기를 봐도 감흥이 없었고, 결혼을 한 뒤에도 언젠가 아기를 한 명은 낳아야지 막연하게 생각만 했을 뿐이다.

나와 3살 차이가 나는 여동생은 아기를 좋아했다. 매일같이 엄마에게 동생을 낳아달라 애원하고 밤이면 밤마다 기도하더니, 정말로 엄마는 내가 중학교 3학년일 때 임신을 해서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남동생을 낳았고, 여동생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동생이 생겨 학교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남동생을 엎고 돌아다니며 물고 빨았다. 나도 내 동생이니까 귀엽기는 했지만 여동생처럼 남동생을 예뻐한 것은 아니었다(당시 고등학생이라 공부에 쫓겨 그런 것도 있다. 남동생 미안).

그런 내가 내 아기를 낳고 보니 세상 모든 아기들이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너희 한 명 한 명이 다 너무나 소중한 존재구나.



아기들은 원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 아니다. 부모의 간절한 바람이든 선택이든 실수든, 어쨌든 부모의 결정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다면 무조건적인 애정과 관심을 통해 올바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새삼 나와 동생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준 엄마, 아빠에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꿀댕이에 대한 커다란 책임감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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