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역사를 결정하는가
반일감정 고조 특수 흥행을 누릴 가능성이 큰 영화, 미드웨이가 지난주에 개봉했다. 잘 만든 영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 <블랙 호크 다운>처럼 생생한 전쟁 영화들과 <더 퍼시픽>, <밴드 오브 브라더스> 같은 전쟁 드라마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건질 장면은 충분히 많다. 롤랜드 에머리히 양반의 영화답게 초반부터 때려 부수기 시작하는데, 많은 양의 서사와 등장인물을 130여분에 압축해서 넣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전개가 매우 빠르다. 그렇다 보니 영화의 서사만으로 내용 파악을 쉽게 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어서, 진주만 공습부터 미드웨이 해전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공부를 조금 해가면 감상에 큰 도움이 된다. 역사 자체가 스포인 것은 어쩔 수 없이 감수.
캐스팅도 화려하다. 우디 해럴슨, 루크 에반스, 아론 애크하트 등. 주연급이 오히려 가장 낯선 배우인데, 주연배우의 매력도 상당해서 약간의 조악함과 비장미를 눈 감게 한다. 오랜만에 맨디 무어의 모습도 볼 수 있는데, 못 알아봤다.
롤랜드 에머리히와 마이클 베이, 쌍제이(JJ.에이브럼스) 세 양반이 나에게는 늘 헛갈리는 대상이다. 자본주의 물량공세 영화를 만든다는 점이 비슷해서 그런가. 감독들 자체가 헛갈리는 건 아닌데, 결과물이 헛갈릴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진주만>이 쌍제이 것인지 마이클 베이 것인지 헛갈리는 식이다. 폭파의 제왕 마이클 베이와 떡밥의 제왕 쌍제이에 비해, 셋 중 그나마 가장 담백한 영화를 만드는 게 롤랜드 에머리히라고 볼 수는 있다. 물론 내 기준이다.
미드웨이는 상업 오락영화로서 훌륭하다. 전쟁영화로서 충분한 볼거리와 재미를 준다. 바다 위 불타는 CG가 간혹 합성처럼 동떨어져 보이는 장면들이 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종사의 목숨을 건 전투-80도 각도로 급강하하며 시원시원하게 폭격을 퍼붓는 폭격기들-를 보고 있자면 다소 긴 러닝타임도 훌쩍 지나간다.
미드웨이는 일각의 우려와 달리 진주만처럼 비장미가 강하지는 않지만, 별 수 없이 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롤랜드 에머리히(혹은 제작사)의 취향을 완벽하게 감추지는 못한 영화다. 건조하게 만들기 위해 상당히 애쓴 흔적이 강하기는 하다. 스필버그가 되고 싶던 롤랜드 에머리히라고 해야 하나. 고증도 제법 철저하다고 한다. 과도하게 극적이지 않으며 전우를 잃고 절규하는 주인공이나, 전쟁터에 나가기 전 미국 만세 만만세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군인은 의외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을 표출하는 장면이나 국뽕을 자아내는 연설 장면만 생략한다고 스필버그의 우아함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새삼 <퍼스트 맨>에서 마지막 스태프 롤이 올라갈 때까지 실존인물의 사진 한 장 넣지 않은 데이미언 셰젤의 얄미운 세련미가 대단하다 싶었다. 그 자신만만함과 얄미울 정도의 군더더기 없음이란. 달리 직접적인 주제 언급 없이 표정과 상황만으로 관객이 스스로 주제를 깨닫게 만드는 스필버그의 역사물들도 새삼 상대적으로 대단해 보인다.
건조해지려고 애쓴 이 영화보다 감독의 옛 작품 인디펜던스 데이 1편이 덜 비장하고 더 간지 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어린 날 기억의 미화인가.
<곡성>의 외지인 아저씨가 이 영화의 최대 빌런이자 일본 패배의 모든 원인을 독박 쓰는 역할(나구모)로 등장하신다. 와따시와 아쿠마데스 아저씨의 연기력을 이런 식으로 소진하지 맙시다 미국인이여. 야마모토는 미화하면서 왜. 일본군을 Japs(ㅉㅂㄹ)라고 부르면서 세차게 두들겨 패던 영화는 마지막에 좀 미안했는지 그들의 사무라이 정신 비슷한 것을 강조하며 멋진 패자의 모습을 조금 퍼주려고 한다. 그 장면이 유난히 사족으로 보였다. 반일감정 때문이 아니라 안 그래도 비장할 뻔한 영화에 비장미를 한층 더한달까. 물론 폭파 성애자 마이클 베이가 진주만에서 막장 삼각관계 사랑 얘기도 하고 싶은데 미군 짱짱맨도 하고 싶고 중구난방 하고 싶은 얘기 다 하던 거에 비하면 훨씬 덜 비장하다.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래도 비장 3대장 중에 제일 양반이니까.
더 건조한 놈들이 사는 나라인 독일 출신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미국인 스필버그처럼 건조하고 고상한 상업영화를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어쨌든 <미드웨이>는 전쟁을 잔인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21세기 초 영화들과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 사실적인 전쟁영화들이 진짜 강조하고 싶은 바는 비극적 전쟁을 게임인 양 묘사하여 오락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신념으로 인한 전쟁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낳는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미카제 돌격을 하던 일본인 조종사들 또한 대부분 광기 어린 전쟁광이 아니라, 출격 전날까지도 울면서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기던 하나하나의 젊은 청년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잘못된 전쟁의 촉발은 훗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떠오른 버섯구름으로 마무리되며, 수많은 민간인들이 가장 인간답지 못한 비참한 방식으로 희생되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 전쟁에서, 나아가 세계 전쟁사에서 의미 있는 전투였다. 태평양 전쟁은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일본은 패색이 짙은 전쟁 중에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본토에 대한 공습만이 전쟁의 종결이라는 결론을 낳게 하여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탄 투하로 이어졌고, 이후 마침내 히로히토 천황이 본토 민간인의 큰 희생 끝에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이 곧 한국의 광복절이므로. 역사를 결정하는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쌓여온 필연일까, 얽히고설킨 실수와 성공의 핑퐁이 거듭 반복된 결과일까, 아니면 간절한 바람과 강한 의지가 모여 이룬 결과일까.
덧.
세계사가 교과 필수과정이 아닌 세대인 나는(변명) 미드웨이 해전에 대한 공부를 사전에 하고 가야 했다. 공부하고 가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즈그들이야 즈그들 중요한 역사니까 좀 더 빠삭하겠지만, 공부하고 가지 않았다면 나는 한참 동안 요크타운이 마을 이름이 아니라 배 이름이라는 것과 미드웨이가 어느 도시의 길 이름이 아니라 섬 이름이라는 것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몰상식은 군 미필자라서 더욱 극심하다.
나처럼 세계사에 무지하지만 전쟁이나 역사에 관심이 많은 관객이라면 다큐멘터리를 보고 갈 것을 추천한다. 넷플릭스에서 재미있다고 소문나서 장안의 화제인 다큐 <10대 사건으로 보는 2차 세계대전> 중 진주만 편과 미드웨이 편, 그리고 마지막화인 히로시마 편을 보고 가면 꽤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전쟁의 흐름이나 인과관계가 머리에 딱 잡히게 잘 만든 다큐라서. 가까운 열도 자식들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자세한 편.
그것조차 보고 싶지 않으며 이 영화를 블록버스터 오락영화로 즐기고 싶은데 블로그에 가득한 역사 관련 글들도 길어서 읽기 싫은 관객(이 영화를 보기 전의 딱 내 상태)을 위해 초간단 역사 스포를 해보겠다. 최소한 이것만 알고 가도 덜 어리둥절할 것이다 정도. 전제는 그 관객이 나처럼 역사와 군대에 대해 일자무식일 것이라는 것이니 똑똑한 관객은 이 브리프를 패스하새오.
*요크타운은 마을 이름이 아니라 배 이름이다.
*미드웨이는 태평양의 어느 섬 이름이다. AF라는 약어(암호)로 일본군에게 불렸다.
*두리틀은 닥터 두리틀이 아니라 도쿄 공습 후 중국에 불시착하게 된, 둘리틀 특공대의 소령이다. 아론 애크하트(하비 덴트)가 맡았다.
*일본(야마모토 사령관)은 해전 중 큰 보유 무기에 속하는 항공모함(특히 미국인에게 항공모함의 상징성은 크다고 한다)을 포함, 전쟁 자원을 크게 파괴하여 미국의 전의를 꺾고자 진주만을 공습하는 또라이짓을 했으며 이것이 미드웨이 해전의 전초전이 되었다. 진주만 공습은 현재까지도 미국인들의 가슴에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인상을 주기는 한다. 냅뒀어도 미국은 언젠가 2차 세계대전에 크게 참전했을 거지만 좀 더 일찌감치 잠자는 거인(야마모토의 표현)을 깨웠달까. 게다가 잠자던 거인이 탈탈 털린 트라우마에 복수심에 이를 갈기 시작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탈탈 털리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큰 위기를 맞은 미군이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일본군의 항공모함 4척을 박살냄으로써, 이 해전은 가장 짧은 시간에 세계 역사의 판도를 뒤엎은 사건으로 평가된다.
덧 2. 우디 해럴슨 아저씨는 얼마 전 좀비랜드 2에서 대머리였던 것 같은데, 대머리가 아니라 그냥 자의적 스킨헤드였구나. 아니면 가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