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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Aug 09. 2020

내 자존감, 오늘도 안녕하신가요?

나를 나답게 하는 것 - 사랑, 유년부터 일궈 온 건강함



벤 스틸러 주연 영화 <괜찮아요, 미스터 브래드>의 미스터 브래드는 다른 사람의 말에 좌지우지되는 대신 40여 년 동안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왔다, 가장 자기 자신답게 살아가기 위해 신념을 좇으며 살아오던 어느 날, 중년의 브래드는 성공한 동창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생각들에 사로잡혀 뜬 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자본주의는 사회의 몸집을 불리는 데 크게 기여하지 않는 구성원에게 너는 불행하다, 너는 패배자다,라고 반복하여 말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스스로 만족스러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남달리 똑똑한 내 아들이 미래를 찾아 나서기 시작한 중요한 시점에 조금 더 편안한 비행기 좌석 하나 쉬이 끊어주지 못하는 아버지가 되고 나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내 아들이 내 아들이어서 덜 똑똑한 남의 집 아들보다 기회를 갖지 못한다면.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해보았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덜 성공한 사람들끼리의 그런 자위는 누군가에겐 정신승리로 비칠지도 모른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고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라고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 남의 평가나 사회적 지위가 아무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남들은 내 실제 가치를 알 길이 없고,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영화에서는 큰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냥 옆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사랑하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행복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아빠가 오늘 날 창피 줬지만 괜찮아. 

사람들은 사실 자기 일만 생각하거든. 

아빠도 내 의견에만 신경 쓰면 돼. 괜찮아.”

“네 의견은 어떤데?”

“사랑해”


나를 잘 알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면 행복한 것이다. 아들이 하버드를 가든 다른 가고 싶은 학교를 가든 무슨 상관이며, 신념을 좇는 나와 눈부시게 사회적 지위의 갭을 벌리는 동창들의 존재가 무슨 상관이랴. 미래를 찾아 나서는 중요한 순간을 직면한 아들에게 편한 비행기 좌석 하나 사주지 못하는 순간처럼 외적인 조건들이 우리가 불행하다고 착각하도록 만들려 할 때, 내가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내가 사랑하는 나 자신답게 살고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나를 나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렇게, 진부하지만 '사랑'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자질들에 대한 스스로의 사랑과, 주변 사람들의 오랜 사랑과 인정.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내 경험으로 이룬 내 감각, 세상 누구의 것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내 생각들, 그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가장 나다운 내 모습을 보아주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들.


조지 클루니 주연의 영화 <인 디 에어>의 주인공 라이언 빙햄은 어린 시절의 상처로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겐 마음을 닫고, 대신 일에만 매진하여 성공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1년 중 300일 이상을 출장을 떠나며 지낸다. 라이언은 원하던 항공 마일리지 천만 달성을 세계 일곱 번째로 해낸다. 그의 옆에 기장이 와서 앉으며 축하와 카드를 건네지만, 원하던 순간이 오자 왜 그렇게 이걸 원했을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집약체 같은 비행기는 어딘가로 떠나는 데 필요한 교통수단이다. 말 그대로 수단. 수단이 목적인 삶을 살아오다가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그다음은 없었다.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조차 어느새 잊어버리고, 삶에 너무 적응해버린 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언젠가 한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괴로워한다는 건, 네 머리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이 말씀에 아직도 동의한다. 진짜로 원하는 것들은 점점 잊고 남보기엔 번듯한 삶을 살며 좋다는 것들을 하나둘씩 손에 넣다가, 어느 날 좋다는 것들을 전부 다 가지고 나서 뒤돌아보면, 본래의 나는 간데없고 남의 인생을 살았다는 걸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뭘 좋아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채로.


전에 한 친구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 인생을 살아. 남의 인생 대신 살지 말고. 나는 그냥 네가 뭘 하든 행복했으면 좋겠어." 


“유년 시절이 끝나다니 믿을 수 없어(I can’t believe childhood is over).”

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작은 아씨들>에 나오는 대사처럼, 자그마한 손가락으로 꽃을 따던 애틋한 유년은 썰물처럼 멀어진다. 어른 된 우리에게 세상 일은 여전히 하나도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 영화에서처럼 형편은 나아지지 않고 가족을 이른 때 떠나보내기도 하고 일생의 사랑을 눈 앞에서 믿을 수 없이 아프게 놓치기도 하고, 넘을 수 없는 제도의 벽도 버겁다. 어머니의 당부와 달리 도저히 해가 지기 전에 풀 수 없는 화와 슬픔은 세상에 너무 많다.


어른의 삶을 사는 동안 나 자신 다움을 잃을 순간을 완벽하게 피해 가기는 어렵다. 가치관이 흔들리는 순간을 버텨내게 하는 힘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지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보내주는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것들이다. 영원히 너만 사랑하겠다는 허무한 약속 대신 묵묵히 이 땅에 매년 어김없이 피는 꽃처럼, 유년에 한 해 한 해 일궈온 나의 건강함으로 묵묵히 나아간다. 오늘도 나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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