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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Feb 18. 2021

이번 우주에서는 망했다, 다른 우주에서 기다릴게

코멧

사랑을 믿지 않는 델과 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킴벌리는 혜성이 보이던 날 만나 강렬한 끌림을 느끼며 만남을 이어가게 되었지만, 너무 다른 성격과 오랜 만남으로 다툼을 반복한다.


5개의 평행우주, 6년의 사랑

유성 쇼에서 첫눈에 사랑에 빠졌던 순간. 서로에게 큰 상처를 남겼던 파리의 하룻밤. 포틀랜드행 기차에서 우연을 가장한 재회. 서로 헐뜯고 배배 꼬며 감정을 분출했던 LA-뉴욕의 장거리 통화. 델과 킴벌리는 이 세계들 속에서 각각 사랑에 빠지고, 싸우고 미워하며 헤어진다.



"그거 알아? 음악, 연극, 영화는 '시간 예술'이라고 하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가야만 감동을 느낄 수 있어. 그런데 그림은 유일하게 시간 제약이 없는 예술이야. 그림에는 처음과 끝이 없어. 그냥 보고 싶은 곳을 보면 돼." 


그건 끝난 그림을 보고 있을 때만 그렇지

그림은 유일하게 시간 제약이 없는 예술이지만 그건 끝난 그림을 보고 있을 때만 그렇지. 그림 안에서 그림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중인 당사자들에게는 그림도 시간의 예술일지도. 


하나하나 별들을 점찍고 길게 그어지는 혜성 꼬리를 따라 선을 이어가며 완성한 너와 나의 우주 그림, 관계에도 가끔 덧칠이 필요하잖아. 덧칠하다 보니 지난 예쁜 추억 그림마저 희미해지네,

영원히 설레는 예쁜 그림 그대로 봉인하고 시간 제약 없이 가끔 꺼내보며 원하는 부분만 원하는 만큼 곱씹으면 더 좋을 텐데, 우리는 더 그릴 여백 없는 그림 위에 서서 서로 헐뜯고 시간에 쫓기며 화를 내고 있었네.



“여긴 내가 있을 세상이 아니야. 우리가 함께 있는 곳이 나의 세상이야.” 



이번 우주에서는 망했다, 다른 우주에서 기다릴게

5개의 평행우주. 우리가 다른 우주에서 만났더라면, 우리는 그때에도 서로를 알아보고 사랑하겠다고 선택할까? 평행우주에서마다 사랑에 빠지려면, 사랑에 빠지기 위한 조건이 동일하게 조성되어야 하겠지.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는 조건은 운명적 마주침(3번 우주)과 아름다운 광경에 대한 공통된 소회일까(1번 우주), 상대의 아름다움일까, 매력적인 성격일까, 그 날의 행운과 기분과 타이밍일까. 우리가 다른 우주에서 만나 또다시 사랑하려면 평행우주이니 외모와 성격은 그대로 유지되겠지만, 그 사이 다른 사랑에 빠지지 않고 만나는 타이밍도 필요하겠지.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우리, 다른 우주에서도 똑같이 싸울까? 똑같이 지겨워질까. 그 우주에서는 오늘 우리가 싸우는 이 사건이 안 벌어질 수도 있잖아. 아니, 사건 자체는 우리가 헤어지는 원인이 아니야. 우리는 너와 나 자체로 관계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사건은 우리가 맞지 않는다는 확신을 주는 트리거가 되었을 뿐이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없는 세상은 아무 의미가 없어. 꿈에서 지난 사랑의 기억들과 서로를 잃는 아픈 미래를 본 델은 킴벌리에게 달려간다. 이터널 선샤인의 "OK"("뭐 어때" 혹은 "괜찮아요"로 번역)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느낌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전쟁 같은 사랑의 적정선은 어디까지인가

입 밖으로 얘기를 하고 나면 막연하던 것이 머릿속에서 일목요연 확실해지면서 더 화가 나기도 하니, 우리는 우리의 기분과 상대의 귀를 보호하기 위해 격하게 싸우지 않는 경우도 많다. 때론 상대에 따라 폭력이 될 수도 있는 침묵. 침묵이 낫다, 언어폭력(!)이 낫다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신없이 싸우고 정신없이 사랑하며 냉온탕 넘나드는 연인이 나오는 영화를 보면 권태기 연인의 막말 향연 및 언어폭력은 어디까지가 평균적 적정 수준인지 늘 궁금해지는데, 그 해답은 그냥 그들이 서로 "OK", 괜찮으면 괜찮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소리치고 헐뜯으며 싸우다가 또 뜨겁게 화해하고 그런 반복이 진짜 사랑하는 연인 같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그런 소모적 사랑은 할 수 없다는 사람도 있을 테니. 



 연인들의 N가지 평행우주라는 매력적 설정, 좋은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그동안의 굿걸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케이티 윈슬렛(이터널 선샤인)이 되지 못한 에미 로섬과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찐따 남주. 혜성과 평행우주 설정은 좋았고 배우들 자체는 매력적이지만 손에 꼽는 인생영화로 여기기엔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아쉽다. 감각적으로 연출했고 화면 색감도 예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묘하게 진부한 감각. 잔뜩 힘준 대사들은 매력적이라기보다는 다소 늘어진다.   

혜성과 별들을 다루는 아이디어와 아름다운 영상, 기억에는 안 남았지만 수많은 대사들 중 가끔 좋은 인상과 기분으로 남은 대사들 때문에 오그라듦과 약간의 있는 척은 견딜 수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싸움구경이고 연인 간의 길거리 싸움은 그중에서도 으뜸이다만, 하이퍼 리얼리티로 싸우는 권태기 커플의 소상한 대화를 영화에서까지 듣고 싶지 않은 사람은 패스해야 할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왓챠플레이에서 감상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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