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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랄라 Sep 25. 2023

길에서 싸우는 연인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영화를 볼 때 특이하게, 

사건이 절정을 맞는 부분보다 

도입부를 훨씬 좋아한다.


특히 아론 소킨이 각본을 쓴 영화의 도입부. 

두 사람이 긴 복도를 걸어가며 

일상적으로 건조하게 대화하는 동안 

영화의 주내용과 연관된 그들의 지난 서사와 

등장인물의 성향이 

주사 잘 놓는 소아과 선생님의 바늘처럼 

스윽 들어와버리는 그의 롱테이크씬을 사랑한다.


아니면 쿠엔틴 타란티노 식 도입부.

사건과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데 

너무 재밌어서 눈을 뗄 수 없는 수다로 시작되는

(실제로는 버려지든 복선이 되든) 도입을 만나면 

이 영화가 절대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이름도 자주 잊어 

“누구더라… 리치몬드 카버?” 

“왜 그 있잖아, 

건조하게 단편 쓰는 미국 근대 작가” 

라고 자주 묻게 만드는 

미국의 체호프,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은 

그렇게 아론 소킨의 긴 복도 도입부 대본이나 

타란티노 아저씨의 수다같음.




인간의 삶은 

브로콜리나 나뭇가지처럼 

일부의 에피소드가 전체를 닮아있을 때가 많은데, 

이 아저씨의 단편들에 잠깐 나오는 

한 아름의 나뭇가지같은 이야기는 

등장인물의 지난 역사와 

여생 전체를 너무 함축하고 있는 

인생zip. 이어서 가벼이 넘길 수가 없다.


벚꽃 피는 계절에 

벚나무 군집지역에 모여든 인파 속에서, 

지나던 두 사람이 걸음을 멈추고 

큰 소리로 싸우고 있는데 

하필 그 내용이 몹시 흥미로워 

그 대화를 토대로 지난 서사를 유추하는 느낌 ㅋㅋㅋㅋ 

모두가 한 장소에서 곱게 차려입고 

행복하게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실은 각자 도생, 각자의 역사와 

각자의 아픔이 있다는 걸 

이 짧은 이야기들에서 체감한다.


건조한 문장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여운을 

이 따위 부박한 말들로만 맺기가 어려우니 

조선대 교수님의 글을 인용해본다.


“19세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전전하며 알코올중독과도 싸워야 했던 그가 쉰의 나이에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말하며 세상을 떠났다. 우연과 고통과 굴욕이 카버의 생을 끝내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감동적인 결론도 적어야 하리라. 


‘만년의 조각글’(late fragment)이라 이름 붙여진 미완성 시가 있다. 이 작품이 사후 출간된 시전집 <우리 모두>(all of us, 2000)의 맨 끝에 수록된 것은 카버가 자문자답 형식으로 자신의 생을 총평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영화 <버드맨>의 도입부에 에피그램으로 삽입되기도 했다.) 전문을 옮긴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너는 / 이번 생에서 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는가? / 그렇다. / 무엇을 원했는가? / 이 지상에서, 나를 사랑받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가장 진솔한 이유를 말하고 있는 이 시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글자도 없다.”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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