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특별판
"많은 것이 모르는 새 시작되죠."
<화양연화> 중에 제일 좋아하는 대사.
왕가위가 영화관 개봉 외에는 OTT에도 어디에도 공개할 예정이 없다고 밝힌 2025 화양연화 특별판. 영화 내에 어떤 내용이 추가된 건 아니고, 엔딩 스태프 롤이 다 올라간 뒤 쿠키 형식으로 추가 10분 정도의 이야기가 있다.
편집된 영화 말고 그 바깥에 있다는 에피소드들에 대한 얘기가 늘 많은 감독이기도 하니까, 없던 내용을 10분 추가한다고 하는 순간 원래 영화의 팬들은 조금 우려를 했을 수도 있겠다. 젊을 때 만들어둔 완벽한 결과물에 미련이 남은 감독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내 말하고 싶던 사족을 기어이 덧붙이려는 것인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 영화는 그대로다.
사실 이쯤 되면 화양연화를 사골연화라고 놀리고 싶기는 했지만 결국 고민 끝에 또 영화관에서 보고 나니 다시 봐도 초 단위로 아름다운, 미친 미감의 영화여서 그 당시 본 영화 분량보다 낙낙하게 촬영해서 남겨두었던 양조위 장만옥 모습을 이렇게 꺼내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다고 해야 하나. 더 풀어 달라고 졸라야 하나.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본 게(그리고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식으로 본 게. 사실상 거의 처음 본 거고 그러니까 한 번 본 영화인 셈이다) 리마스터링 재개봉했던 2020년 말이었다. 거의 5년 만에 본 영화인 셈인데, 아름다운 그림은 잘 기억하는 편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너무 기억이 생생하게 있어서 놀랐고, 반면 후반부쯤 양조위가 내내 간직했던 꽃신을 다시 가져가며 립스틱 묻은 담배를 남겨두는 장만옥의 모습이나, 서로 창문 너머를 엇갈려 쳐다보는 슬픈 얼굴, 같은 것은 의외로 몹시 중요한 부분인데 생소했다. "나예요, 배표 한 장 더 있으면 나와 같이 갈래요?" 가장 좋은 시절, 어쩌지, 하는 짧은 찰나 그 시간을 다 놓쳐버리고, 피워보지 못한 꽃을 내내 그리며 살았던 삶이란.
"난처한 순간이다
여자는 수줍게 고개를 숙인 채
남자에게 다가올 기회를 주지만
남자는 다가설 용기가 없고
여자는 뒤돌아서 떠난다"
눈물 때문에 뿌옇게 흐린 창문 너머 엇갈린 인연이 마음 아프지만, 다른 선택을 도저히 할 수 없던 두 사람.
만약 이 사람들이 기어이 만나려면 평행우주 정도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 답답한 시대의 시선 속에서 나쁜 이름으로 서로가 명명되도록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 사랑하기에.
"지나간 세월은
먼지 쌓인 유리창처럼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 없기에
그는 여전히 지난 세월을 그리워한다
만약 그가 먼지 쌓인 유리창을 깰 수 있다면
지나간 세월의 그때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옛날 사람들은 비밀이 있으면 어떻게 했는지 알아? 산에 가서 나무에 구멍을 낸 다음 거기다 비밀을 털어놓고 진흙으로 막았대. 그럼 비밀은 영원히 그 나무에 갇히고 아무도 모르는 거야."
전부터 양조위가 캄보디아까지 원정 가서 돌구멍 안에 비밀을 속삭이고 막은 흙이 너무 허술하다고 느꼈는데, 본격 양조위가 너무 허술하게 덜 틀어막은 구멍 사이로 비밀이 비집고 나오는 바람에 결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비밀봉인원정대
나는 평행우주를 안 믿는다. 아니 나의 평행우주를 안 믿는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지만, 나라는 애는 골백번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사람이란 걸 너무 잘 알아서. 그 선택들은 당시 내가 가진 모든 배경지식과 판단력을 동원한 거지 어떤 무드나 감정에 의해 뭔가 중요한 걸 선택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평행우주가 있다면 모든 우주에서 나는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짓을 하고 있을 것 같아. 젠장.
"그 시절은 지나갔다
그 시절이 가진 모든 것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슬프지만 다시 시간을 되돌려 선택하라고 해도 우리에게 우리 기준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고 같은 선택을 할 거니까, 우리는 단 10분의 평행우주에서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