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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by 랄라

"청아한 음성이 되어 허공에 떠다니는 아름다운 윤동주의 언어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쓰여진 시’, 1942.6.3.-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4년 전 쯤, 2011년 11월 어느 밤 ‘가을, 윤동주 생각’이라는 MBC특집 다큐를 보고, 위 두 줄을 수 없이 곱씹으며 요절한 미완의 청춘에 대한 안타까움에 잠 못 이루던 날이 있었는데 ‘동주’를 본 날도 그랬다.


윤동주가 수감된 일본 형무소에서 그들의 마루타가 되어 해수를 주사기로 몸에 주입 받다가 세균감염으로 사망했다는 것은 이미 전부터 가설이 아닌 사실로 입증되고 있고, 그래서 사실 윤동주를 최초로 영화화한 반가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아파서 볼 자신이 없던 영화였다. 영화는 잔인한 현실을 덤덤하게,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하게 그렸다. 실제 인물에 대해 알고 있기에 수감 전, 영화 초반 해맑은 동주의 모습을 볼 때부터 가슴이 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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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채화처럼 맑은 윤동주의 시를 또박또박한 딕션과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내려가는 배우 강하늘 덕에 영화는 아름다웠다. 활자로만 접하던 아름다운 윤동주의 언어는 배우의 청아한 음성이 되어 허공에 떠다니자 더욱 아름다워졌다.


“빛나던 미완의 청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동주”


영화 카피처럼 생애를 끝낼 때까지 출세하지 못하고 학교를 다닌 시인. 요즘으로 따지면 마흔 정도까지 학업을 지속하는 상태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윤동주는 쉽고 고운 우리 단어들로 시를 썼다. 시를 잘 몰라도 윤동주의 시를 보면 굉장히 맑은 사람이 썼다고 느낄만큼 청춘의 순수함과 반성이 가득하다.


이름 석 자 조차 허락 받지 못한 시대에 강제로 창씨개명을 마친 뒤 서류를 떨구던 청춘의 떨리는 손, 서류에는

‘히라누마 도주’ 라는 낯선 활자가 적혀있었다. 무릎에 툭, 떨어지는 서류처럼 툭 내려앉던 마음.


몰락한 세상에 태어난, 아픈 시대의 청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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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고 싶고, 시인이 되고 싶은 것이 너무 부끄럽다며 진술서 종이를 찢는 윤동주의 떨리는 손과 마지막 절규는 그래서 슬프다. 강하늘이 수채화같이 맑은 목소리로 부른 엔딩곡과 함께 엔딩크레딧 뒤로 보이는, 청춘들이 웃으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들은 그래서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다. 얼마나 고뇌하며 그 시대를 살아냈을 지. 얼마나 아프게 청춘의 꿈을 포기하였을 지.


영화 속 연전시절, 밤늦게까지 시를 읽다가 말다툼이 붙은 몽규와 동주, 어색함을 깨기 위해 집에 데려다 달라는 여진의 말에 여진을 따라나선 동주. 개인적으로 두 사람이 이 때 걷는 가을길 장면이 이 영화 속 아름다운 장면 탑 3 안에 드는 듯 하다. 조용하고 어두운 밤, 두 사람 뒤를 비추는 가로등 불빛과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별빛 가득한 밤하늘,

강하늘의 목소리로 살아난 윤동주의 아름다운 언어들.


윤동주의 시는 고등학교 때부터 좋았다. 아마 국어책에 삽입된 윤동주의 사진 때문일지도 모른다. 국어책은 '잊지 못할 윤동주’에서 정병욱이 묘사한 그의 외모를 발췌, 인용하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 오뚝한 코, 한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 한 마디로 그는 미남이었다.”

저항시인 프레임은 후대에 씌운 감이 크다. 친일파가 아닌 극히 드문 시인 중, 순 우리말 위주의 쉬운 단어들을 사용해 곱고 청아한 자아성찰적 시를 써온 미남 시인의 생애 이야기란, 사람들이 충분히 사랑할만한 스토리인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신의 한 수는 강하늘이 부른 엔딩곡과 함께 나오는 마지막 모습들, 청춘들의 모습이 주는 맑고 아픈 여운이다. 윤동주는 감옥에서 병에 걸려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고 시대는 청춘을 억압했지만 그 비극 뒤에 바로 이어지는 청춘들의 모습은 청춘 그 자체처럼 아름답다. 해맑게 웃고있는 청춘들의 행복했던 한 때. 저렇게 고운 청춘들이 그렇게 맥 없이 희생되어, 희미한 재로 사라져갔구나.


아픔 속에서 끝없이 고뇌하면서도 맑게 빛났던 청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미완의 청춘, 윤동주.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모티브로, 영화의 각본을 쓴 신연식 감독이 쓴 주제가 ‘자화상’의 가사.

너무 아름다운 노래라 찾아보니 보컬이 강하늘이고, 강하늘의 청아한 음색이 아름다워 가사를 자세히 찾아보니 가사가 눈물 나도록 슬프고 아름답다. 현대인이 이렇게 아름다운 가사를 쓸 수 있다니……



-자화상-

오래 전에 떠나온 고향집에 가보니

미처 세월 닿지 못한 난

기억 그대로 거기 서 있어

너는 어디서 너는 멀리서

날 또 찾아 돌아왔나

이 내 모습이 그 기억 그대로

날 반겨주며 서있는데

우 너무 그리워서

우 나를 불러본다

우 떠난 나는 다시

우 나를 돌아본다

뭐든 될 수 있던 그 때

난 세상만 바라봤지

나를 떠나서 날 남겨두고서

외면하고 달려갔지

나를 불러대는 내 목소리가

이제 와서 들려오네

너는 어디서 너는 멀리서

날 또 찾아 돌아왔나

이 내 모습이 그 기억 그대로

날 반겨주며 서있는데

우 너무 그리워서

우 나를 불러본다

우 떠난 나는 다시

우 나를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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