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REVIVRE)

삶에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보다 이별과 상실의 순간이 더 많다

by 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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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28회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훈의 단편소설 '화장'을 영화화한 임권택 할아버지의 작품. 소리소문 없이 영화관에서 내려갔지만, 추천으로 읽은 원작소설의 강한 여운 때문에 찾아보게 되었다.



주인공 김상무(안성기)는 화장품 회사의 임원이며 뇌종양 말기로 투병하는 아내를 극진하게 보살피고 있다. 김상무 자신의 신체도 노화하고 있어, 전립선염 때문에 소변을 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간의 몸은 매일 음식물을 섭취하고, 에너지로 쓰고 남은 찌꺼기를 배출하며 운영되는 소모 기관이다. 인간이 찌꺼기를 배출하는 과정은, 마치 이 세상에 그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 듯 배우자에게조차 숨겨져 있다. 죽음과 한패인 병은 프라이빗한 영역에 대한 주도권을 잃고 다른 사람 앞에서 이를 까발리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다. 긴 투병으로 지쳐가던 시기와 맞물려 김상무는 회사에서 매일 마주치는 신입사원 추은주(김규리)를 마음에 담게 된다. 병으로 자신의 신체를 콘트롤 할 수 없는 아내나 자신과 달리 추은주의 신체는 젊고 완전무결하다. 제목 '화장'은 시체를 소각한다는 火葬의 의미와 얼굴에 화장품을 발라 꾸민다는 化粧의 의미를 동시에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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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의 추은주는 무덤덤하고 약지 않았으며, 아무 의도없이 그저 거기에 존재하는 한 젊은 여자처럼 묘사 돼 있다. 소설 속에서 김상무가 추은주를 향해 무덤덤하게 독백으로 읊어가는 아름다운 문장들은 중장년에 느끼는 연모의 감정도 젊은 우리들의 것과 다르지 않거나 더 성숙한 사랑일 수 있음을 느끼게 한다.
영화 속 추은주는 아무래도 매체 특성이 달라서일 수 있겠으나 원작 속 추은주 느낌보다는 조금 더 의도성을 띈 것처럼 느껴지고, 노골적이다. 할아버지 감독님의 시선이라서일 수도 있고, 소설 속의 그 느낌대로는 영화에서 살릴 수가 없기 때문일 듯도 하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소설과 마찬가지로 매우 덤덤하게 삶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비극들을 관조해가고 있어 좋았지만 추은주가 김상무에게 와 닿는 묘한 그 기운이 다소 당황스럽고 촌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부분도 있고(자연스러운 '젊음'이 아니라 '색기'에 집중하는 느낌), 등장인물의 상황이나 자초지종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하는 대사가 너무 설명을 위한 대사인 게 티가 나도록 다소 장황해서 '응?' 하게 되는 대목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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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생명력 넘치고 빛났을 아내의 몸 속에 새로운 독립 생명체인 악성 신생물이 자라가고, 새로운 생명이 몸 안에 자라감에 따라 기존의 생명력은 쇠퇴하고 점점 시든 거죽이 되어갈 때, 한 때 사랑했던 젊고 신비한 육체가 노화와 질병으로 꺼져가는 생물학적 육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모습으로 활짝 펼쳐져 다가올 때, 삶도 사랑도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 싶어 숙연해진다. 소설이나 영화나 그 자연스러운 쇠퇴의 과정을 앞에 두고 울거나 한탄하지 않아서 좋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무거워진다.
'생활의 바탕이 없는 문장은 공허하다. 일상의 구체성, 삶에 대한 직접성 위에 글을 세우자'는 원작자 김훈의 말처럼 이 소설과 영화 속 투병과 장례 과정에는 실제 일상의 비루한 부분들에 대한 구체성이 무섭도록 드러나서 몰입감이 더 커진다.



가까이에서 들여다본 한 사람의 삶에는 보풀이 가득하다. 인생에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보다 이별과 상실의 순간이 더 많고, 삶 중엔 피어나서 완성되어 가는 청춘의 시간보다 자신을 붉게 태우다가 검게 소멸해가는 시간이 곱절은 길다.
젊고 푸른 나만큼 젊고 빛나는, 완벽해 보이는 타인을 사랑하는 환희의 순간이 질병이나 다른 외부 요인들로 인해 손상되지 않고 빈틈없이 완벽할 수 있는 기간은 채 10년을 넘기지 못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운전기사가 모는 세단을 타고 다니며 10억 짜리 아파트와 별장을 가진, 비교적 안정적인 경제상황 속 주인공에게도 '죽음'과 '죽음의 일면, 죽음을 향해가는 과정인 병'은 삶을 송두리째 흔들 정도로 고통스럽고 피할 수 없는 재앙이다. '죽음이 삶을 완성한다'는 등의 달콤한 예찬은 속수무책으로 드러나는 일상의 거친 보풀,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시련의 일상성 앞에서 아무 위로가 되지 못한다. 긴 투병 끝에 사망한 아내의 빈소에서 오랫동안 연모한 여자의 셔츠 사이로 눈길이 가는 상황의 잔인함.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변명하든 그게 죽음과 유한한 삶이라는 과제를 안고 태어난 인간의 삶이고 영화와 소설은 그 유한함 속에서 존엄을 지키기 힘든 우리를 담담하게 묘사한다. 단 하나의 유의미한 위로는 '누구나 그렇다. 너만 그런 것이 아니다'일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김상무가 마음에 품은 젊음에 대한 연모를 나무랄 수 없다. 어쩌겠는가, 비극의 주인공으로서의 존엄조차 지키기 힘들게 생긴 것이 원래 인간의 삶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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