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서(Dancer/2016)

우아한 짐승, 세르게이 폴루닌의 일생

by 랄라


댄서, 다큐멘터리


연출: 스티븐 캔터
출연: 세르게이 폴루닌(본인)



"난 발레를 선택한 적이 없어요. 발레는 그저 나 자신이죠."

로얄 발레단 역대 최연소 수석무용수
19세에 영국 로얄 발레단 역대 최연소 무용수로 발탁된 남성 댄서, 세르게이 폴루닌. 1989년 11월 20일생(만 27세), 우크라이나 헤르손 출신. 영국 로얄 발레 스쿨을 졸업하고 19세에 바로 발레단 역대 최연소 수석무용수로 발탁되었다. 19세 댄서가 수석무용수가 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발레계에서는 뜨거운 화두의 중심에 있는 슈퍼스타였다. 처음에는 솔리스트였지만, 그와 함께 춤추던 동료들의 말대로 그는 - "It(he) was too big for soliste. 그는 그냥 솔리스트이기에는 너무 대단했죠."
만약 세르게이 폴루닌이 단역으로 황금불상 역할을 맡으면 관객들이 주인공 대신 불상에 집중하기 일쑤였기 때문에, 발레단은 그를 수석무용수로 발탁하는 수 밖에 없었다. 수석무용수로 발탁된 후에도 이견없이 실력을 인정 받았고, 특유의 나른하고 반항적인 미모로 '발레돌' 대접 받으며 인기도 톡톡히 누렸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천재 댄서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테크닉이 뛰어난 발레리노라고 해서 유럽에서 스타 발레리노가 되기는 힘들다. 자신만의 해석과 스타일, 몸짓이 주는 감동이 있어야 대중에게 차별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세르게이 폴루닌의 로얄발레단 시절 동료의 말에 따르면, 그가 주연으로 캐스팅된 공연이 월~수요일까지 있을 경우, 그는 월요일에 멋진 공연을 하고, 수요일에 가면 또 다른 멋진 공연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클래식 발레는 굉장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종류의 춤이다. 로얄발레단에서 세르게이 폴루닌은 발레의 안무와 공연, 테크닉이 허락하는 한에서 자신만의 해석을 하며 매 무대마다 틀에 박히지 않은 춤을 췄다.

'우아한 짐승'

어린 시절 세르게이 폴루닌은 기계체조와 발레를 동시에 배웠고, 그의 어머니 말에 따르면 타고나길 유연했다. 갓 출산한 아기의 다리가 너무 많이 스트레치 되는 바람에 의사가 놀라서 어머니에게 이야기했을 정도. 본격적으로 발레의 길을 택한 뒤에는 기계체조 베이스의 흔적을 지우려고 애썼다지만, 세르게이 폴루닌의 춤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인 '도약'에 있어서는 어린 시절 쌓아온 기계체조 베이스가 차별점이 되는 부분이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로얄 발레단 시절 그의 동료가 '세상에서 가장 우아한 짐승'이라고 불렀을만큼, 세르게이 폴루닌은 거칠고 강하게 스텝을 밟다가 소리없이 높이 뛰어오른다. 시그니처 급 점프의 화룡정점은 체공 시의 우아함이다. 세르게이 폴루닌이 땅을 딛고 도약해 허공에 머무르는 동안, 1, 2초 가량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독보적인 근력을 바탕으로 매우 멀리, 높게, 과감하게 날고, 도약해 있는 동안 자세가 매우 안정적이고 우아해 나른한 느낌마저 들며, 체공시간이 매우 길다. 착지할 때는 고양이가 바닥에 뛰어내리듯 조용하고 안정적이며, 다리 동작의 군더더기나 흐트러짐이 없다.
"신의 날개를 빌린 발레리노" 라는 국내 프로모션 홍보문구는 그의 도약을 떠올리면 조금도 과장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는 발레계의 배드보이
헐리우드 배우의 길을 가겠다며 발레단을 박차고 나왔다가 각종 잔잔한 비행으로 한때 러시아 발레계의 '배드보이'라 불리던 시절, 그 핫하던 시절인 2014년 노보시비리스크 발레단 백조의 호수로 내한했는데, 그 공연을 직접 본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지그프리트 역을 맡은 세르게이는 '중력이 뭐임? 먹는 거임?'하며 허공을 가르고 날아다녀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나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특별공연 실황'을 보면 한니발의 노예 감독 역할을 맡은 세르게이 폴루닌을 볼 수 있다. 그 때는 그것이 세르게이 폴루닌인 줄도 모르고 그저 춤과 도약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해두었는데, 백조의 호수 내한 공연을 보고 하도 그 점프와 몸짓들이 낯이 익어서 찾아보니 역시나 '갸가 갸인' 상황이었던 것. 정말 놀라웠다. 몸짓만으로 자신을 각인시킬 수 있다니.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기념 공연 실황에서도 세르게이는 뛴다기보다는 나는 것에 가까운 우아함을 나를 압도했었다. 그렇게 강한데 그렇게 우아할 수가 없었다.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은 포기했다

유순한 노력파 남성 댄서들 중에도 엄청난 역량의 댄서들이 분명 많지만, 세르게이 폴루닌은 전설의 댄서이자 안무가인 루돌프 누레예프와도 감히 비견되는(언론에서 많이 비교하지만, 아직은 이 레전드들에 비견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까지 성실함이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은 두고 볼 일이다.) 본투비 천재 댄서이기도 하다. 축복받은 재능에도 불구하고 반항과 방황을 거듭해 팬들을 안타깝게 했던 세르게이 폴루닌.
발레 댄서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아주 어린 나이에 발레를 시작해야 하고, 이것이 부모님의 선택이든 어린 본인의 선택이든 일생 전체를 좌우하는 선택인 것에 반해 자신의 이성적인 의지가 얼마나 작용할 수 있을 지 의문이다. 영화에서 세르게이 폴루닌의 로얄발레단 시절 동료가 말했듯, 한 사람이 발레 댄서로 살았다는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다른 모든 것은 포기했다'는 것을 뜻한다. 세르게이 폴루닌은 타고난 재능을 가졌다는 이유로 본인이 어떤 선택과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서 가족에게 보답해야 하는 힘겨운 짐을 인생의 시작단계부터 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미 출신의 수많은 댄서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부담을 겪는다. 물론 세르게이 폴루닌은 이 눈에 띄는 천재들 속에서도 두드러지게 천재였다는 두드러진 차이점을 갖는다.

"나는 발레를 선택한 적이 없어요. 발레는 그저 나 자신이죠"
유튜브에서 높은 조횟수를 기록하며 화제가 된, 호지어의 음악에 맞춰 춤 춘 은퇴 영상. '댄서'에서도 소개된 그 유명한 영상은 세르게이 폴루닌의 29년 삶 전체를 4-5분 안에 집약한 것이다. 영화는 그가 은퇴를 위해 이 마지막 영상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인생 최고의 기량을 뽐낼 수 있도록(하지만 그는 매 공연 늘 완벽했고 최고의 기량이었다) 마지막 춤을 준비하고, 4-5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삶을 집약된 춤으로 추며, 영상을 찍는 내내 울고 있을만큼 치열했던 모습을 보여주며 새로운 세르게이 폴루닌의 모습을 소개한다.
자극적인 기사들로만 세르게이 폴루닌을 접했기 때문에, 온몸 가득한 문신이나 나르시즘, 인터뷰 펑크 등의 기행이 어려웠던 어린시절과 지나친 주변의 기대감, 모든 것을 너무 빨리 이룬 뒤의 소강상태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사실 많이 놀랐다. 자신이 선택했는지 아닌 지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치열하게 전개된 댄서로서의 삶, 어린 나이에 성공하고 넘사벽 세계 일류가 돼 버리면서 시작된 허무함, 그의 반항기를 가득한 스케줄과 틀에 박힌 규율로 잡으려던 발레단과 사회, 언론. 다큐는 그 속에서 고작 20대 초반일 뿐인 이 청년이 어떤 하루를 살아냈을까를 한참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발레를 선택한 적이 없어요. 발레는 그저 나 자신이죠"라는 말에서 그의 삶과의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굉장히 오만한 답변일 수도 있는 말.


실제로 봤을 때도 그렇고 어떤 영상에서 그가 추는 춤을 보든 늘 그랬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춤추고 도약하는 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수없이 뛰어오른 그 리듬으로 도약해 허공에 머무르는 단 몇 초, 타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 위한 몇 분, 몇 시간을 위해 이 사람은 어떤 시간과 세월을 살았을까.


댄서, 세르게이 폴루닌
어린 나이에 세계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서서 보장된 꽃길을 걸을 수 있었는데, 쌀 한 톨만큼의 미련도 없어보이게 단숨에 박차고 나와 보여준 행보는 영화같다. 그에게 로얄발레단 최연소 수석무용수라는 타이틀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가 뭐라고 부르든, 소속이 어디든 그냥 그는 그 자체로 세계 톱클래스의 댄서인데. 허름한 연습실에서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허름한 옷을 입고 춤을 추어도 어느 유명 무용단의 어느 무대 위, 어느 수석 무용수보다 빛나는 세르게이 폴루닌인데 말이다. 세르게이 폴루닌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느냐에 따라 훗날 그 반항기조차 하나의 예술로 평가받을 수 있지 않을까. 다 똑같은 삶, 다 똑같은 재능은 재미 없으니까 말이다.

영화는 흔하게 접할 수 없었던 세르게이 폴루닌의 어린 시절부터의 영상과 아픈 가족사까지 근접하게 접근한다. 그 유명한 호지어의 "Take me to church"와 함께 하와이의 눈부신 햇살과 녹음 속에서 촬영한 마지막 댄스영상은 분명 아름답다. 4-5분의 영상 안에 고뇌와 고민을 압축하여 담아내려 애썼고, 창틈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르며 눈부신 도약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5분 안에 세르게이 폴루닌을 다 설명하기에는 부족해보인다.

1989년생의 이 댄서는 아직 한국 나이로 고작 29세. 29년의 세월 동안 이렇게 완벽하게 극적인 발레리노의 일생을 영화 콘텐츠로 뽑아낼 수 있도록 이야깃거리를 쌓은 삶이라니. 천재의 삶은 그래서 개인에게는 고통 투성이일지 몰라도 많은 타인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지도 모른다.

사실 무대에서의 완벽한 실력과 멋진 외모 뒤에 따라 다니는 '풍운아, 배드보이, 제임스 딘, 짐승'과 같은 수식어들 때문에 잊기 쉬운 그의 어린시절은 남다른 노력으로 점철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는 의외로 타고난 재능만으로 설겅설겅 춤을 추는 댄서가 아니었다. 사실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겠지만, 발레계에서는 남다른 노력없이 톱의 자리에 오르는 천재라는 건 존재하기 어렵다.

29년 밖에 살지 않았지만 발레 하나로 꽉 찬, 세르게이의 빈틈없는 일생에서 확인할 수 있듯, 그가 현재 완벽한 자세로 쉽게 허공을 가르고 날 수 있는 건 완벽하게 체득된 하루하루의 습관, 하루하루 연습의 결과일 것이다.

세르게이 폴루닌이 아직 은퇴하지 않아서, 동시대를 사는 현직 댄서여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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