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s Apart(국내제목:나의 사랑, 그리스)

완벽한 이해 없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우리

by 랄라

Worlds Apart
분리된 세계, 떨어져 있는 세상
(국내 개봉 제목: 나의 사랑, 그리스)/2015




갈등과 고통, 외부 장애요인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우리가 미움을 극복하고 내면을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건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는 우리.




2011년에 어릴 때부터 가고 싶었던 그리스에 갔다. 그리스는 늘 상상하던 대로 비옥하고 뜨거운 도시였는데 그리스의 섬에 앉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푸른 지중해 수평선이 분홍빛 노을로 물드는 저녁을 맞을 때면 왜 이곳 사람들이 신화를 만들어 왔는 지, 왜 전 세계 문화에 영향을 미친 위대한 사람들이 되었는 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신비하게 깎인 절벽과 푸른 지중해에 일렁이는 햇살, 물기 가득 머금은 땅, 자신만만하고 따뜻하고 솔직하고 뜨거운 사람들. 너무 따뜻하고 아름다워서 여기에는 정말 신이 살았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때도 이미 그리스 경제는 무너지는 중이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의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아픔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일상 하루 하루가 전투"라거나, "삶이 전쟁"이라는 등의 장난같고 자조섞인 비유가 무색해질 만큼, 실제로 진짜 전쟁과 파국을 겪고 있는 나라들. 고통받는 지구상 2/3의 사람들. 현실의 퍽퍽함을 이민자와 같은 외부요인 탓으로 돌릴 수 있도록 교묘하게 세뇌하고 그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이익을 취하는 진짜 악마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유럽인들의 머릿속에 제노포비아를 심어 하나된 세계를 가르게 만드는 교묘한 세뇌.
자신이 선택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떠밀리고 쫓긴 삶들, 허공에 떠도는 인권들. 지구 어디에서나 이 떠도는 인권들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이 보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 열쇠는 어이없이 간단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듯 '사랑'일 것이다. 프시케와 에로스 신화의 결실이 "플래져(기쁨)"임이 암시하듯, 사랑은 고대부터 인간이 외부 장애와 고통 속에서도 내면에 얻어들일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었다.


세상 모든 언어의 기원이 된 언어와 민주주의의 시초가 된 사상들을 만들어내며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그리스의 경제상황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처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에 있고, 믿을 수 없이 벼랑 끝에 몰린 삶을 사는 시리아 난민들은 그리스를 통해 유럽으로 유입된다. 극심한 경제난을 겪는 그리스인들과 난민들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생존과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삶은 이어지고 사람들은 사랑한다. 언어가 완벽하게 통하지 않아도 교감할 수 있고 서로의 존재에서 위안을 얻는다. 영화 도입부에서도, "사랑하는 얼굴만은 모두 똑같다"라며 이 인류 공통의 고무적인 감정을 예찬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어도,
완벽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중에서-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의 부제는 각 에피소드의 핵심과 영화의 주제를 매우 잘 담고 있고,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예측 가능하고 굳이 꼭 이렇게 구성해야 했나 싶은(개인적 생각) 하나의 맥으로 다시 이어진다. 영화를 관통하는 또 하나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이다. JK시몬스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개되는 에로스 신화와 사랑에 대한 정의는 영화 전체의 주제를 관통한다.
죽음의 신 하데스까지 만나고 오면서(영화 속에서 "지옥까지 다녀온"이라고 번역해서 좀 아쉬웠다. 관객이 하데스가 죽음의 신이라는 것을 모두 알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한 번역인 것 같은데, 신화 모티브를 계속 언급하는 영화와 보다 어울리는 표현은 좀 달랐을 것 같다) 서로를 갈구한 프시케와 에로스는 처음에 불신으로 어긋나지만 마음을 다해 두번째 기회(second chance)를 얻었고 결국 해피엔딩을 맞았다. 이 영화 속 세 가지 에피소드 중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은 한 커플 뿐이다. 세대, 인종, 국경, 성별, 가족역할 프레임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인물들 속에서 이들이 두 번째 기회를 얻은 것도 사실 앞서 언급한 경계와 집단 반목을 허물었기 때문일 수 있다(외국인이며 세대도 다른 교수에게 어머니의 책을 가져다 주는 모습처럼).


현재 불행의 원인을 외부대립집단에서 찾으며 특정집단을 혐오하는 안토니의 모습은 현대의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는 무지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집단 전체를 겪지 못했지만 그 중 일부에게서 입은 피해를, 그 집단 전체를 보는 프레임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유례없는 혐오와 반목의 시대, 지구 반대편에서도 여기에서도, 어쩌면 원인은 우리가 추측하는 것(우리에게 주입된 것, 우리가 학습한 것)과 다른 데에 있을지도 모른다. 안토니의 미움은 부메랑처럼 안토니에게 고스란히, 아니 곱절로 고통스럽게 되돌아왔다.


지오르고에게 물정 모르고 공감능력 없어보이는 천진한 질문을 던지며, 이 불행이 너의 탓이라는 뉘앙스로 이야기하는 엘리제도 마찬가지다.
"그런 우울증 약을 왜 먹어?"
"네가 밤에 낮의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무방비로 잠들었는데 갑자기 집에 누가 쳐들어와서 너를 때리고 위협한다고 생각해봐. 그런 날이 매일 반복된다고 상상해봐. 그게 지금 내가 사는 이곳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야."
"왜? 그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내집에 쉽게 들어올 수 있었어? 내가 문을 잠그지 않았나? 실수로 문을 열어뒀나?ㅋㅋ내 잘못이 정말 조금도 없어?"
"세계 인구의 2/3이 고통 속에 살고 있다는 거 알아?"
"그건, 그 사람들 잘못이야."
물론 서로를 완벽히 이해하고 가치관이 일치해야만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다. 아니 어쩌면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 제시되는 예시처럼 생각이 일치하고 여러 조건이 맞는 것이 아닌데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보다 더 그 사람의 본질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지도 모른다.
엘리제는 뒤늦게 혼란에 빠져 눈물을 흘리며 본국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지오르고가 먹는 것과 같은 약을 삼키고 눈물지어야 했으며, 일년 후 우연히 마주친 지오르고를 한참동안 바라보지만 거기까지였다.




지오르고의 말마따나 차가운 북유럽 사람과 뜨거운 남유럽 사람의 만남. 사실 상처에 더 취약하고 예민한 쪽은 자기 주변으로 벽을 쌓고 애써 거리감을 두려하는 쪽이라는 생각도.
"왜 내 아내와 아들에 대해 안 물어봐?"
"난 내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일에 대해서만 들어. 사람들 앞에서 반지를 끼고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양 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묻지 않는거야."


전혀 다른 인상의 플랫처 교수님(무스와). 의자 집어던지고 막말하던 문어대가리는 어디갔음? 이렇게 인자한 할매미소라니




뻔하고 유치한, 촌스러운 앵글과 전개도 많은 영화지만(특히 나는 묘하게 이 세 가지 이야기가 하나로 묶인 이후가 마음이 찡하면서도 진부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세 에피가 그대로 마무리 되었어도 그 나름대로 깔끔했을 것도 같다), 반질반질 세련되게 잘 닦인 영화가 갖지 못한 다른 매력도 많이 갖췄다. 그리고 눈빛의 교환이나 촉감, 사랑하는 사이의 온도와 사랑할 때의 오감이 잘 표현된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이 포스터 테러국이라는 악명이 자자한데, 옴니버스 로코인 척 하는 국내 포스터와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제목, 유치한 카피는 마케터들도 진심으로 좋아서 그런 건 아니고 잘 팔고 싶어서, 보다 많은 국내관객이 인종차별, 난민, 빈곤, 전쟁, 미지의 것과 미래에 대한 공포, 청년실업, 경제 및 가족붕괴 등의 이슈에 공감하길 원해서 그랬다고 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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