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김훈, 공터에서

우리를 둘러싼 일상의 보풀들, 삶의 조악함

by 랄라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이 이 소설 뿐 아니라 대부분의 김훈 소설을 정확하게 정의해주는 것 같다. 김훈의 신작(이라기엔 좀 몇 달 되었다만) '공터에서'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어온 세대의 무지렁이(라기에는 좀 어렵지만 아무튼)를 대표하는 인물 아버지 마동수와 독재정권 세대를 살아온 그의 아들들 마차세+마장세의 삶을 따라가며 시대의 아픔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굉장히 지루할 것 같은 줄거리라서 주춤, 망설였는데 늘 그랬듯 살짝 서점에 서서 읽어본 도입과 첫 챕터 흡입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내 발은 계산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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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마음에 드는 소설책을 외우도록 반복해서 읽었었다. 아름다운 문장이나 묘사, 글만으로 눈 앞에 아찔하게 펼쳐지도록 연출한 전개 같은 것을 보면 중독되는 건지, 책장에서 계속 좋아하는 책들을 꺼내 마음에 드는 그 페이지를 찾아서 여러 번 읽곤 했다. 20대 후반이 지날 무렵부턴가 소설책을 읽는 것이 어느 순간 시간이 아까워졌다. 갑자기 고대 철학에 빠지기도 했고 주로 인문학적 지식을 주는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김훈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심지어 김진명이랑 헛갈려했음(......).
그런데 최근 소설책 읽는 재미를 찾아준 것이 김훈의 소설들이었다. 요즘은 소설을 읽더라도 SF소설 위주로만 읽고 있었고 한국 여류작가들의 소설은 애정물일 경우 정말 좀 정서에 맞질 않아서 읽기가 힘들었는데(한강 제외) 아! 정말 재미있다. 계속 궁금하고, 계속 말맛이 그립고 해서 보게되는 소설들이 김훈의 소설들이었다. 맞아. 이렇게 마음에 드는 부분은 다시 펼쳐서 몇번씩 읽고, 곱씹고, 아름다운 장면이 있으면 계속 바라보며 행복해하듯 그 문장 자체를 즐기는 독서를 했던 게 언제이던가, 싶게 만들어준 게 김훈의 소설들이었던 것 같다.

다른 소설 속에서와 마찬가지로 '공터에서'에서 김훈 작가는 극적이고 굴곡진 삶을 그리는데도 굉장히 미지근한 온도로, 덤덤하게 그린다. 사실 그게 그 시대의 보통 소시민의 삶이라서이기도 하고, 원래 삶의 비극을 담담하게 그리기도 한다. 누구나 겪는 삶의 비극이라고 해서 비극이 아닌 것은 아닐진대 그 비극을 굉장히 구체적 일상 속에서 묘사하고 있어서 덤덤하게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몰입도가 높아진다. 작가 본인도 '일상의 구체성이 없는 문장은 공허하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일상의 구체성이 없는 문장도 자주 좋아하지만 김훈 소설들 속 일상의 구체성은 숨이 턱 막히게 와 닿는다. 한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배설 조절을 하지 못하는 대목에서는 '아, 사랑했던 이성의 신비로운 육체지만 죽음이라는 당연한 인간의 숙명 앞에서는 그저 한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로구나. 그럼 그동안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라고 죽음의 덧없음, 인생의 유한함과 허무함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든다. 장례를 치르고 결혼해서 집을 구하는 과정에 구체적으로 들어가 있는, 그 삶의 비극 속에 정신 차리고 이어가야 할 업무같은 소소한 행정(?)들과 소요비용 얘기가, 주인공의 감정 상태를 유려하게 묘사하는 대신 비극의 멱살을 실감나게 끌어다가 독자 눈앞에 가져다 놓는다. 이 모든 과정에 가득한 삶의 보풀들과 우리를 둘러싼 조악함. 삶은 영화같지도 소설같지도 않다.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죽음과 한패인 병마 앞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랑은 그렇게 영화처럼 빛나고 멋지기만 하지도 않고 탄생이 그렇게까지 거룩하고 숭고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거한 인생의 소재들을 두렵게 묘사하고 있음에도 덤덤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겪어갈 당연한 삶의 보풀이 조금은 덜 수선스러워진다. 누구나 겪게 될 일임이 그 구체성 안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ㅋㅋ

우리의 삶은 어쨌든 유한하고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죽음의 한패인 병은 늘 우리 삶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게 나 본인이 됐든, 가족이 됐든 한번씩은 겪어야 할 고통이다. 암, 치매, 노화, 죽음. 가족과의 작별. 김훈의 소설에서 거의 빠지지 않는 요소들이다. 그 다가올 고통의 일상성, 구체적인 묘사들이 독자(나)를 괴롭게 하지만 단 하나의 위로는 '너만 그런 거 아니다. 죽음과 병, 사랑하는 사람과의 작별, 그리고 나 자신의 노화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인생의 수순이다'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김훈 소설이 허무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 허무주의를 의도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삶은 이런 것이다 라고 있는 것을 묘사했을 뿐인게 아닌가 한다.

문장이 길지 않고 문장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어휘는 쉬운 우리말이다. 장소의 구체성이 인상적이고 일이 벌어지는 과정에 대한 세세한 묘사가 현실감을 훅 가져온다. 무엇 때문이라고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한 번 펼쳐서 읽기 시작하면 중단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냥 다 떠나서 너무 재미있다. 문장이 쫄깃하고 한 단어 한 문장을 얼마나 고르고 고민해서 썼는지가 느껴진다. 쉽게 읽히는 소설을 쓰려면 작가는 매우 어렵게 쓰지 않겠나 생각해본다.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소설책 읽기가 힘들었던 게 이만한 고민이 들어간, 가독성 높은 소설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라고도 생각해보았다.
사실 김훈 소설에서 여성성(?)이 묘사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끔 불쾌할 때도 없다고는 말 못하겠는데 일단 아빠 뻘도 넘는 어르신이고 보수적 성향이신 어른이라고 생각하면 그냥 문제삼을만 하지는 않다. 게다가 그 묘사들이 실제 현실과 괴리감이 크지도 않다.

불행하고 힘들었던 시대와 가족. 가난이라는 굴레와 빈껍질이 되도록 몸을 짜내 자식을 키워낸 부모네 대한 부채감.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가족은 사랑하지만 짐이었다. 사랑도 짐이었다. 무지렁이로서 살아내야 할 힘겨운 하루하루 어른의 삶. 새 가족이라는 새 짐.

"마차세 상병에게.
너를 상병이라고 부르니까 우리가 짧은 끈으로 현실에 바싹 묶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슬프다. 그걸 받아들이는 게 나이를 먹어가는 과정이겠지. (중략) 숲 속에서 새들이 수런수런 날개 쳤어. 새들이 날아오르면서 흰 가슴으로 노을을 받았어. 새들을 보면서, 날아 다니는 것들은 고향이 없고, 부모자식이 없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마지막 날숨이 빠져나갈 때 마동수의 다리가 오그라졌다. 마동수는 모로 누워서 꼬부리고 죽었다. (중략) 아, 끝났구나 끝났어...... (중략) 사람이 죽어도 그의 한 생애가 끌고 온 사슬이 여전히 길게 이어지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을 옥죄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마차세는 예감했다. 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예감은 끝났다는 사실보다 더 절박했다."

김훈의 소설은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면 유난히 깨끗하고 싼 것들을 구하기가 쉽고 흔한데 역시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여서인가. 아무튼 다음 김훈의 작품이 또 기다리고 있다. 직장인 노예는 함부로 퇴근하고 펼쳤다가 밤새우기 무서우니 주말에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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